눈을 뜨니 파고다(Pagoda) 정문이다.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스님이 빙그레 웃고 있다. 부처님을 지킨다는 사자상(象)이 지그시 내려다본다. 황망히 고개를 숙이고 신발을 벗는다. 오랜만의 맨발이 쑥스럽다. 햇빛을 받은 대리석의 감촉은 따스하다. 올려다보니 황금빛 탑이 아찔하게 서 있다. 어디서 오는지 향내가 그윽하다.

이 나라의 전통 하의인 론지를 입은 청년들이 꽃을 든 채 사뿐사뿐 지나간다. 동자승은 불상을 향해 몇 번이고 절을 올린다. 타나카(천연 화장품)를 바른 여인들의 눈빛이 수줍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저 멀리 시내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베일에 가려 있던 황금의 나라, 2500년 불교역사를 가진 미얀마의 첫 인상이다.

○양곤, 황금의 탑을 찾아서

여행의 시작은 미얀마 제1의 도시 양곤에서부터다. 인구 600만의 대도시다. 시내를 나서면 우리의 1960~70년대 풍경이 펼쳐진다. 다른 동남아 도시와 달리 길거리에 오토바이가 없다. 미얀마 정부가 양곤 시내에 이륜차 통행을 금지한 탓이다. 곳곳에 삼성, 대우 간판도 눈길을 끈다. 한국 기업들이 최근 미얀마에 많이 진출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미얀마의 정신적 지주이자 세계 불교도의 성지 중 하나인 쉐다곤 파고다로 향한다. 이 파고다는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유일한 유적지다. 기록에 따르면 2500년 전, 한 미얀마 상인이 부처님의 머리카락 8개를 얻어와 이곳에 안치한 후 불탑을 건설했다고 한다.

경내 곳곳에는 미얀마 사람들이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다. 하나같이 맑은 얼굴들이다. 경건한 분위기에 속된 마음마저 정화되는 느낌이다. 이윽고 높이 98m 황금빛 대형 불탑 앞에 서자 입이 절로 벌어진다. 외벽에 1만3000개의 금판을 두른 이 탑의 꼭대기엔 76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고 한다. 속세의 기준이라지만, 미얀마 사람들의 불심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쉐다곤 파고다 인근엔 미얀마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국립묘소가 있다. 우리에겐 1983년 아웅산 폭파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 등 정치적 문제로 출입은 물론 사진 촬영도 엄격히 금지된다. 냉전의 상처는 21세기의 여행객에게도 씁쓸하다.

차이나타운으로 발길을 옮긴다. 꼬치로 유명한 ‘19번가 골목’에 들어서니 각종 노점상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엔 그만이다. 여기에 미얀마의 자랑인 ‘미얀마 비어’ 한 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시골 맥주 별거 있겠냐는 선입견은 마시고 난 뒤 단번에 사라진다. 2005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세계맥주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을 정도로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바간, 극락(極樂)이 여기로다

바간은 3000여개의 파고다가 밀집돼 있는 천년 고도(古都)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유적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손꼽힌다. 바간의 파고다는 지금도 계속 지어지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파고다를 짓는 데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민중을 강제 동원해 만든 ‘피의 유적지’가 아니기 때문일까. 바간에서 만난 미얀마 사람들의 얼굴엔 진심어린 존경이 묻어난다.

42㎢의 방대한 지역 곳곳엔 저마다 개성 있는 파고다가 숨어 있다. 황금모래 언덕의 ‘쉐지곤 파고다’, 높이 10m의 불상 4개가 잠들어 있는 ‘아난다 파고다’, 외벽 조각들이 섬세하게 살아 있는 ‘틸로민로 파고다’가 그중에서도 꼭 방문해볼 만한 곳. 마차를 타고 타박타박 이동하면서 보면 나름 운치 있다. “안냐흐~.” 마부가 말을 부리는 명령어는 재미있으면서도 구슬프다.

바간의 백미는 ‘쉐산도 파고다’ 위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전경이다. 경사가 아찔한 계단을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도 잠시, 파고다 정상에 오르면 숨막힐 듯한 석양이 펼쳐진다. 지평선 끝까지 아득하게 이어진 수천개 불탑의 장엄함이 여행객을 압도한다. 지상에 극락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만달레이, 그대 마음에 평화를

미얀마의 셋째 날. 첫 행선지는 아침식사 참관이다. 아침을 먹는 게 아니라 아침식사를 구경한다니…. 여행객의 궁금증은 스님들의 긴 행렬을 보고서야 풀린다. 미얀마의 엘리트만 모인다는 명문 불교학교 ‘마하간다용’ 사원의 아침 탁발이다. 마을에 밥 내음이 자욱한 가운데 붉은색 가사를 걸친 스님들이 줄을 선 채 아침밥을 공양받는다. 어린 티가 완연한 동자승까지 탁발 행렬에 동참한다. 줄이 길다고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 없다. 공양하는 미얀마 사람들의 얼굴은 행복함 그 자체다. 이들에게 불교는 종교가 아닌 생활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 다리로 유명한 ‘우패인 다리’는 수도원 근처에 있다. 200년 전 1000여개의 티크 나무로 만든 이 다리는 길이가 1.2㎞에 달한다. 이곳의 일몰 풍경은 전 세계 사진가들에게 각광받았다고 한다. 종종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 본다. 겉보기에 엉성한 다리는 제법 튼튼하다. 조심스런 여행객을 놀리듯, 아이들은 다리 위를 뛰어가다 풍덩 강으로 뛰어든다.

미얀마의 젖줄 에이야와디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북쪽에 있는 밍군으로 향한다. 1790년 세계 최대의 사원을 꿈꾸며 야심차게 지었던 ‘밍군 파고다’. 작업은 30년도 안 돼 중단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19세기 영국의 침략으로 나라가 쇠약해진 탓이다. 짓다 만 기단 높이만 72m. 맨발로 힘겹게 파고다를 오르니 에이야와디 강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식혀준다. 여행객을 따라 기념품을 팔러 올라온 미얀마 소년들은 도무지 지친 기색이 없다. 아이들에게 이곳은 놀이터이자 삶의 터전이리라.

○인레 호수, 시리도록 아름다운

헤호 공항에서 버스로 1시간을 달려 인레 호수의 입구인 냥쉐에 도착한다. 여기서 3~4인용 모터보트를 타고 인레 호수를 내달린다. 호수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폭이 11㎞에 달한다니 바다처럼 수평선 끝이 보이질 않는다. 간혹 보이는 그림 같은 수상 리조트가 눈길을 끈다.

호수 곳곳에서 한 발로 노를 젓는 뱃사공들을 만난다. 인레 호수에 사는 소수 부족 인따족이다. 조그만 나룻배 끝에서 용케도 중심을 잡고 서서 노를 젓는다. 통발로 고기를 잡는 게 이들의 하루 일과다. 한 소년이 배를 몰고 다가와 방금 잡은 물고기를 내민다.

한 기념품 가게에서 목에 긴 고리를 차고 있는 파다웅족 여인들을 만났다. 여섯 살부터 목에 링을 차고 1년에 하나씩 늘린다고 한다. 사진으로만 보던 파다웅족을 실제로 보게 돼 신기한 마음도 잠시, 이들이 관광객과 사진을 찍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딘가 서글픈 그네들의 눈빛에 셔터를 누르면서도 내내 찜찜하다.

여행의 마지막 숙소로 향하는 길, 호수 저 너머로 무지개가 보인다. 청정한 하늘은 숨죽인 채 여행객을 응시한다. 그 하늘을 가를 기세로 보트는 끊임없이 달린다. 지금껏 여행 중 만난 미얀마 사람들의 얼굴이 스친다. 순수한 그들의 미소가 아련하다. 돌아가서 해야 할 산적한 일도 잠시 잊은 채, 광활한 인레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밍글라바(안녕), 미얀마.

양곤·바간·만달레이·헤호=백수전 기자 jerry@hankyung.com

■ 여행 팁

아열대 기후인 미얀마에선 3계절이 뚜렷하다. 10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는 건기여서 방문하기 가장 좋다. 시간은 한국보다 2시간30분 늦다.

미얀마어를 쓰고 영어도 어느 정도 통용된다. 공식통화는 차트. 달러를 준비해서 현지에서 환전해야 한다. 1달러에 860~870차트 정도다. 구겨진 달러는 받지 않는다. 지방에선 환전하기 어렵기 때문에 양곤 공항에서 미리 해두자.

로밍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양곤에서 KT로 간혹 전화가 연결될 뿐 나머지 도시에선 먹통이다. 와이파이도 일부 호텔에서 겨우 잡히는 수준이다.

파고다는 불탑의 영어식 표현인데 미얀마어로 퍼야(Phaya)로 불린다.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의미다. 파고다는 원래 부처님의 사리와 유품을 묻고 세운 조형물이다.

미얀마에선 파고다를 건축하는 일을 최고의 공덕으로 여긴다. 파고다에는 맨발로 들어가야 하므로 슬리퍼나 샌들을 챙겨오는 게 좋다. 짧은 반바지나 미니스커트 차림도 입장 금지다.

웬만한 기념품은 양곤 공항면세점에 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대한항공이 지난달 13일부터 인천~양곤 직항노선을 주 4회(화·목·토·일) 운항하고 있어 오가기가 편리해졌다. 5시간 정도 걸린다. 1588-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