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 소액주주들이 김쌍수 전 한전 사장과 정부를 상대로 낸 사상 초유의 7조원대 전기료 손해배상 청구소송(1심)이 원고 패소로 결론나면서 정부는 일단 큰 부담을 덜게 됐다.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 정부가 한전에 전달하는 직·간접적인 인상요율 가이드 라인은 단순 권고(행정지도)에 불과하며, 전기요금의 인가기준 설정은 전적으로 인가권자인 지식경제부 장관의 재량권에 속한다는 게 이번 판결의 요지다. 재판부가 그동안 여섯 차례의 변론에서 정부가 내세웠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원가보다 정책 판단이 우선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전기요금 인가권자로서의 정부 역할을 광범위하게 인정해줬다. 정부가 대주주의 지위와 인사권을 이용, 한전 이사회의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소액주주들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전기요금의 인가기준 설정은 지경부 장관의 자유 재량에 속한다”며 “전기사업자인 한전의 사회적 책임과 전기사업의 공익·공공성, 한전이 전기판매 분야에서 갖는 독점 지위를 고려할 때 한전이 제시하는 총괄원가를 모두 보상하는 수준에서 전기요금이 결정돼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물가상승 수준이나 한전의 비용절감 노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전력감독 책임자인 지경부 장관이 고유한 정책 판단을 기초로 전기요금을 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해 준 것이다. 한전은 그동안 전기료 산정이 전기사업법에 규정된 총괄원가(적정원가+적정투자보수금) 기준에 못미쳐 매년 적자가 불어나고 있다고 항변해왔다. 지경부 관계자는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 총괄원가라는 형식 논리보다 경제상황을 감안한 정부의 정책 판단을 우선시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또 한전 소액주주들이 김쌍수 전 한전 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배임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정부의 감독을 받는 공기업이 정부의 권고(행정지도)와 다르게 전기요금을 산정해 인가 신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기요금 현실화 주장도 약화될 듯

하지만 이번 판결은 정부의 정책적 재량을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그동안 전기요금 현실화를 주창해온 한전의 입지를 더 좁히는 계기로도 작용할 전망이다. 한전은 올 들어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 원가 수준 이상의 요금 인상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번번이 대립각을 세워왔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이번 소송에서 한전은 제3자로 한발 벗어나 있었지만 소송 당사자들만큼 판결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라며 “재판부가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 정부 개입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보다 한전의 사회적 책임과 비용절감 노력을 언급한 만큼 부담이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전은 이번 판결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김 전 사장의 1심 승소로 김중겸 사장 등 현 이사진에 대한 소액주주들의 추가 소송 가능성이 희박해진 데 대해선 반색하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소송 당사자가 아닌 만큼 재판 결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김 전 사장이 배상 책임을 면한 데 대해서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은 한전 주가에 단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김승철 메리츠종금증권 애널리스트는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번 판결로 한전에 대한 정부의 규제리스크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정부도 한전의 대규모 적자를 언제까지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주가에 미치는 파급력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한전 주가는 전일 대비 550원(1.95%) 떨어진 2만7600원에 마감됐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