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샛말로 ‘대졸 백수’ 김동극 씨가 처음 손댄 것은 ‘고래심줄’ 사업이었다. 대학원 진학과 취직을 놓고 고민하던 차에 친구로부터 고래심줄로 테니스라켓 줄을 만드는 사업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일본에서 고래심줄을 수입한 뒤 이를 가공해 스포츠용품 제조업체에 납품하는 사업이었다. 한국에도 테니스 붐이 일기 시작하던 때여서 꽤 괜찮은 사업이 될 듯싶었다.

그는 학군장교(ROTC)로 복무하면서 받은 급여로 사두었던 소 세 마리를 팔아서 종잣돈 127만원을 만들어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가 1971년.

3년 반 만에 그의 첫 사업인 고래심줄 사업을 접었지만 김동극 극동GNS 회장(65)은 지금도 고래심줄 사업하던 때를 기분좋게 떠올린다. 그는 “생애 첫 사업을 손실없이 350만원을 벌고 중단할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다”며 “내 사업의 첫 아이템인 고래심줄 같은 의지와 열정으로 사업을 추진하면 절대로 망하거나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김 회장의 사업 인생은 그 후 성공 가도를 달렸다. 몇 번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고래심줄 같은 집념으로 이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사업 시작 40년 만에 세계 1위의 큐빅주얼리 업체인 극동보석과 그를 포함한 계열사 6개의 극동GNS그룹을 일궈냈다.

극동보석이 생산하는 제품은 큐빅지르코니아(CZ)보석으로, 줄여서 ‘큐빅’이라고 부른다. 큐빅은 지르코니아 파우더와 이트륨옥사이드를 전기로에 넣어 2800도로 가열해 만든다. 커팅된 큐빅은 육안으로 봐서는 다이아몬드와 구별하기 힘들다. 큐빅은 강도가 뛰어나 개발 당시 우주선 유리창으로 사용하다 이후 보석 재료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극동보석은 큐빅주얼리에 관한 한 풀라인업 체제를 갖추고 있다. 원석 생산에서부터 보석가공, 판매까지 일괄 시스템을 갖춘 세계 유일의 업체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도둑들’에 나온 110캐럿 옐로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도 이 회사가 만든 제품이다. 매달 10만~15만개의 큐빅주얼리를 만들어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전 세계 10개국에 판매하고 있다. 연간 매출은 5000만달러. 경쟁사들과 큐빅주얼리 분야 매출이 배 이상 차이나는 명실공히 세계 1위 업체다.

김 회장이 사업 40년 만에 이런 회사를 만들어낸 과정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고래심줄 이후 다른 사업거리를 찾던 그는 1975년 집안 친척의 권유로 보석 가공업에 발을 들이게 된다. 투명 규석을 가공해 모조 비취와 에메랄드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3년간 보석가공 사업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으나 투자금을 댄 동업자와 경영상 견해가 달라 사업을 넘겨주고 그는 이듬해 큐빅가공 업체인 고려농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고려농역은 부실 경영으로 3개월 뒤 부도가 났다. 그는 밀린 월급과 퇴직금 대신 연수정원석 130㎏과 큐빅원석 1㎏, 보석가공기 10대를 받았다.

그의 선택이 남았다. 고민하던 그에게 회사에 남았던 보석가공 기술자 7명은 “월급은 나중에 벌어서 줘도 좋으니 회사에서

속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고심 끝에 보석시장의 가능성에 베팅했다. 200만원의 빚을 내서 1979년 이리(현 익산)귀금속공단 내에 그의 이름을 뒤집어 딴 ‘극동보석’이란 이름으로 공장을 지었다.

그가 공장 설립 후 맨 처음 한 것은 수출 판로를 찾는 것이었다. 제조는 공장 직원들에게 맡기고 그는 가방을 들고 전 세계 9개국 16개 도시를 돌며 바이어를 찾아다녔다. 한 달 반에 걸친 장기 여행이었다. 당시 그의 가방 속엔 주얼리샘플과 KOTRA에서 받은 보석거래 업체 주소와 전화번호뿐이었다. 김 회장은 “무작정 회사로 쳐들어가 제품을 보여주며 거래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영업 방식으로 그는 이듬해 100만달러를 수출하는 성과를 냈다. 1983년까지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

시장에 업체들이 잇따라 진입하면서 가격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가 사업을 시작할 때 1캐럿당 7.5달러 하던 큐빅 가격은 4년 만에 30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때 김 회장은 레드오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연구·개발(R&D)과 디자인에서 찾았다. 김 회장은 경쟁업체들이 경쟁적으로 가격 인하에 나설 때 토파즈 원석에 방사선 가공을 해 영롱한 빛깔을 내는 인조 토파즈를 개발했고, 이 제품은 시장에서 대히트를 쳤다. 또 디자인 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현재 극동보석의 디자이너는 30명. 이 팀은 연간 1만8000여개의 주얼리를 디자인하고 있다. 극동보석이 글로벌 기업으로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1988년이다. 홍콩 보석전시회에서 미국의 홈쇼핑 채널인 QVC와 공급계약을 맺었다. QVC는 그 후 25년 동안 매년 2000만달러어치 이상의 제품을 구매하고 있다.


김 회장은 1993년 사업을 본격적인 글로벌 체제로 전환했다. 원석생산은 한국, 주얼리 가공·생산은 중국, 글로벌 판매는 미국 등으로 역할 분담 체계를 완성한 것. 특히 미국 판매법인 럭스젬(LUXGEM)은 최신 주얼리 트렌드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보석과 관련된 모든 사업(마케팅, 세일즈, 상품기획, 금융, 디자인 개발, 중국공장 운영 관리)을 주관하고 있다. 럭스젬은 그의 장녀 부부가 전담하고 있다.

김 회장은 자체 브랜드 ‘키에라(KIERA)’를 키우는 데 전력하고 있다.

김 회장은 “앞으로 키에라에 대한 마케팅을 국내시장에서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아시아시장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라며 “키에라를 ‘티파니’처럼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교육 사업에도 '앞장'
中에 청운학교재단 설립…美 GIA 한국분교 유치

김동극 극동GNS 회장은 교육자 집안 출신이다. 부친 김필제 씨가 28년간 충남에서 교편을 잡았고, 4남2녀의 형제부부 가운데 7명이 교단에 서 있다.

김 회장도 교육에 관심이 많다. 중국 공장이 있는 칭다오시에서 한인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2008년 현지에 청운학교재단을 세웠다. 재단 산하의 초·중·고등학교에서 현재 760명의 한국인 교포 및 주재원 자녀들이 공부하고 있다. 내년에 학교를 확장 이전해 정원을 1500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그는 “매월 1주일 정도는 학교 일과 한인회 일로 칭다오에 머물고 있다”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지금 하고 있는 사업 중 가장 보람있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보석업계서도 후학 양성에 열심이다. 차세대 디자이너와 감정사 양성을 위해 1989년 미국 보석 감정·디자인 교육기관인 GIA의 한국 분교(GIA코리아)를 유치했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도 유명하다. 고등학교 때 1년 반 동안 권투를 배워 2학년 때 충남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했고, 3학년 때는 종목을 바꿔 유도선수 대표로 나갔다. 골프 실력도 수준급이다. 2007년엔 레이크힐스CC에서 60세 이상 골퍼가 참여하는 시니어대회에서 76타로 우승했다.


박수진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