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채권은행 더이상 '갑' 아니다
지난 26일 웅진홀딩스의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신청 소식을 접한 신한은행 여신 담당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날 오전 9시 극동건설 1차 부도 소식을 듣고도 ‘괜찮겠지’하고 낙관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극동건설과 함께 지주사까지 법정관리에 들어가 그룹 전체의 해체 가능성이 거론되는 지경에 이르러서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은행권의 중론이다.

주채권은행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은행과 기업의 갑을 관계가 바뀌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은행이 돈줄을 틀어쥐고 기업 위에 군림하는 시대는 먼 옛날 얘기가 됐다. 재무정보를 알려달라고 해도 “우리가 왜 알려줘야 되느냐”는 반응을 듣기 일쑤다.

이 같은 현상은 구조적인 요인에서 빚어진 것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은행에 돈을 빌려달라는 기업이 줄을 서 있었는데 최근 들어 기업들이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금시장이 늘 초과수요 상태였던 외환위기 전과 달리 최근에는 공급 과잉 시장이 됐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자본금의 99.4%였다. 1998년 상장기업 평균 부채비율이 400%에 달하던 것과 대조적이다. 기업의 재무상황은 건전해졌지만 달리 보면 신규투자 등 자금 수요가 줄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유망한 기업에는 돈을 빌려주겠다는 대출 경쟁이 일어난다”며 “리스크가 있어도 거래처가 다른 은행으로 갈까봐 쉽사리 회수에 나서기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금융환경이 달라진 것도 큰 원인이다. 자본시장이 성장하면서 기업이 기업공개(IPO), 회사채 및 기업어음(CP) 발행 등으로 직접 자금을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까지는 기업 채권 중 은행 보유채권 비중이 90%를 넘었는데 요즘에는 약 40~60% 수준에 불과해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채권은행의 기업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도 크게 감소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예전에는 기업이 경영상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은행이 참여해 정보를 공유하고 방향에 대해 훈수도 두곤 했다”며 “요새는 기업이 공개하는 재무제표와 세무 관련 자료 일부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정보를 얻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기업이 발행한 어음이 어느 정도인지, 만기가 언제인지 등이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잦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동반 법정관리를 신청한 26일 어음 발행 규모 등에 대해 웅진 측에 문의했지만 지금은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밝혔다.

이상은/김일규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