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어제 기자회견을 통해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유산에 대해 공식 사과함으로써 최근 첨예한 논란을 빚은 과거사 인식 문제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박 후보는 스스로 작성한 사과문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5·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예상보다 강도 높게 사과했다. 특히 “국민들이 진정 원하시는 게 딸인 제가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국민대통합위원회 설치를 해법으로 제안한 것도 전향적 자세로 평가된다.

당장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필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진정성을 평가했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측도 일단 환영한다는 반응이었다. 다만 문 후보 측은 “제대로 된 화해의 기준은 몇 마디 말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실천에 있다”며 시비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물론 이번 사과는 지난 10일 “인혁당 판결이 두 개”라는 발언 이후 지지율 하락 등 수세적 입장에 몰려 부득이하게 나온 것이다. 후보 개인의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나라의 미래를 기약해야 할 대선에 앞서 불필요한 논란은 조기에 정리해 두자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박 후보의 사과를 보면서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역사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에 대해서는 착잡함을 금할 길이 없다. 역사는 그 자체로 공과(功過)가 뒤엉킨 모순덩어리다. 한국 현대사는 더욱 그렇다. 빛과 그림자 어느 한쪽으로 재단할 수만은 없다. 역사의 빛과 그림자는 동일체이지 결코 따로 떼어내 평가할 대상도 아니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시대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는 개발독재라는 후진 개도국의 근대화 과정이며 발전의 과정이었다. 리콴유의 싱가포르, 마하티르의 말레이시아도 박정희를 따라 걸어갔던 길이다.

박정희 시대 개발독재의 성과물이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토대를 구축했다는 것은 두 번 강조할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산층도 그것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5·16, 유신과 경제개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식민지라는 쓰레기 통에서 나왔으되 기어이 장미꽃을 피워낸 것이 우리의 역사다. 바로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1970년대 사채(私債) 동결, 중화학공업 육성과 같은 자본 집중 투입은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기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강제적 자본동원은 소위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 아래선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역설적이게도 세계 최고 수준의 고도성장이었고 오늘날 G20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밑거름이다. 박정희 시대를 놓고 공과가 6 대 4니, 7 대 3이니 하는 도식으로 나눠 분열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박 후보가 과거사의 불행을 시인한 것을 빌미로 일부에서라도 한국 현대사를 독재와 불의로 점철된 역사처럼 매도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또 한국 현대사가 부정과 부패로 일관했다는 식의 외눈박이 역사관이 득세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누가 뭐래도 끝없는 도전과 거대한 성취의 역사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극심한 전쟁까지 치른 나라가 불과 두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만큼 이뤄낸 사례는 세계에서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등 한국형 발전모델은 지금 무수한 개도국들이 배우고 싶어 안달하는 바로 그 모범답안이다. 이런 팩트를 무시한 채 한국 현대사를 실패와 불의의 역사로 기록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자랑스런 조국에 살고 있는 것이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대다수 국민은 좌파진영의 왜곡·편향된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 어떤 나라에서도 경제성장 없이 민주화를 이룬 경우는 없다. 따라서 문·안 후보도 과거사 인식 논란의 구경꾼이 아니다. 이제 박근혜에서 문재인 안철수에게 공은 넘어갔다. 이들도 한국 현대사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를 바란다. 박정희 시대의 과(過)에 대해 박 후보가 정리했듯이, 두 후보는 그 시대의 공(功)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사실 역사는 투쟁과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불행히도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면서 역사를 정치무기화하려는 좌편향적 사고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 안철수와 문재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