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명품창출포럼의 초대 회장을 맡은 박성철 신원 회장(72)은 당시 “유럽의 명품 브랜드를 인수하려고 한두 곳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5개월 만인 이달 초, 박 회장은 가방 한 개에 2000만원이 넘는 이탈리아 브랜드 ‘로메오 산타마리아’를 전격 인수했다. 외환위기 때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까지 겪은 신원이었기에 ‘설마’했지만 그는 진짜로 명품 브랜드를 사들였다. 신원이 처음으로 인수한 해외 브랜드이자 글로벌 명품 사업을 시작하는 신호탄이다.

중국 상하이 법인을 둘러보고 잠시 귀국한 박 회장을 지난 19일 서울 공덕동 신원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피곤한 기색 없이 힘찬 악수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두고 보세요. 몇 년 안에 신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패션업체가 될 겁니다.”

박 회장은 “신원이 내놓은 최고급 남성복 ‘반하트’처럼 고품질·고가의 명품급 여성복을 론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베스띠벨리·씨·비키 등 중간 가격대의 여성복 외에 ‘글로벌 명품’으로 키울 수 있는 브랜드를 신원의 39년 경력을 담아 내놓겠다는 의지다. 요즘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에 대해 그는 “기업들이 해외에 나가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데 선거를 앞두고 있다고 정치권에서 너무 기업을 옥죄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먼저 ‘로메오 산타마리아’ 인수를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유럽의 명품으로 불리는 여러 브랜드들이 제안서를 들고 왔었어요. 그 중에서 신원에 없는 액세서리(가방 신발 등) 브랜드를 살펴본 거고요. 특히 ‘악어백’이 최고급 명품으로 최근 몇 년 동안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 브랜드로 결정한 겁니다. 사실 또 다른 악어백 브랜드인 콜롬보(제일모직이 인수)도 검토한 바 있어요. 로메오 산타마리아를 인수하고 싶어하던 국내외 패션 기업도 여러 군데였는데 신원의 패션 노하우와 건실한 경영 등을 이 회사가 높이 산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에 설립한 ‘S.A.밀라노’ 법인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됩니까.

“밀라노 지사는 기존에 로메오 산타마리아를 판매하던 유럽 전 지역의 사업을 종합 관리하는 동시에 앞으로 신원이 펼쳐나갈 글로벌 명품 사업의 중추기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내년엔 신원 본사가 밀라노 법인으로부터 로메오 산타마리아 제품을 수입해 중국과 국내에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벌일 거고요.”

▷글로벌 명품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건 추가 인수·합병(M&A) 계획도 있다는 뜻인지요.

“물론입니다. 지금도 검토 중인 브랜드가 있어요. 제품력이 뛰어나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브랜드라면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 핵심 역할을 밀라노 법인이 맡을 겁니다.”

▷유럽에 이어 북미나 다른 지역으로 진출할 계획이 있습니까.

“내년이 될지 그 후가 될진 모르겠지만 북미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법인을 세울 생각입니다. 지금은 지사 형태의 생산 공장만 있거든요. 유럽 사업부터 자리잡은 후에 미국도 시작해야죠.”

▷신원이 과거 워크아웃 졸업에 성공해 1차 도약기를 맞았고, 지금은 두 번째 기회라는 분석이 많은데요.

“네, 지금이 바로 제2의 도약기라고 생각해요. 40년 가까이 우리는 국내 위주로 사업을 해왔는데 3년 전쯤부터는 패션 산업이 완전히 글로벌화됐잖아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도 작년부터 서둘러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을 발판으로 북미, 동남아와 중국까지 영역을 확장하면 연간 1조원 매출을 넘어 2조원, 3조원으로 성장하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면 과거 신원의 전성기보다 더 많은 직원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겁니다. 곧.”

▷워크아웃을 겪었던 경험이 피와 살이 됐을 것 같습니다.

“그럼요. 한번 겪었기 때문에 지금은 절대 차입경영을 하지 않습니다. 자금을 빌려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는 성장구조를 만드는 데 주력해 왔거든요. ‘이익을 기반으로 한 성장’은 교과서적인 경영철학처럼 보이겠지만 실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15년 전 연간 370만장이라는 엄청난 재고 부담을 안았던 신원이 지금은 매장에 깔려 있는 제품 이외의 재고는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가벼운 구조로 바뀌었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매장에서 요구하는 적정 물량보다 10% 더 적게 재고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닥쳐도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겁니다.”

▷재고 부담을 낮추는 것만큼 품질을 유지하는 일도 중요할 텐데요.

“그래서 개성공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인건비는 저렴한데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니까요. 반하트의 기술 고문인 알바자 리노 디자이너가 작년 말에 저와 함께 개성공단에 갔다가 극찬했을 정도입니다. ‘비접착 방식의 슈트 제작기술이 이탈리아보다 낫다’고까지 하더라고요.”

▷최근 북한 정세가 급변하는 탓에 개성공단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습니다만.

“신원은 2005년부터 개성공단에 1호 기업으로 진출했습니다. 저도 한두 달에 한 번씩 개성을 둘러보는데요. 개성에 총칼 차고 다니는 사람 없습니다(웃음). 물론 휴전선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있지만 개성만은 정치·경제가 분리된 공간인 셈이죠. 개성에서 전화로 상황을 보고해올 때도 미싱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아주 평온하게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신원이 글로벌 기업으로 지금보다 더 성장하면 생산량도 뒷받침돼야 하니까 개성에 공장을 추가로 짓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정치권에서는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재계에선 불만이 많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경제민주화라는 게 결국 제도라는 틀 안에 기업을 넣겠다는 건데, 기업을 독재주의자처럼 운영하면 안 된다는 절차적 민주주의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기업 경영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민주주의화하는 게 맞죠. 그러나 글로벌 시대를 맞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이 시대에 ‘민주주의적 경영’에 방점을 찍고 일하는 경영자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업이 이윤을 내고 그 혜택을 주주들에게 돌려줄 것인지를 고민하게 마련이죠. 합법적이라는 전제 아래 기업이 이윤을 더 많이 내기 위해 뛰는 게 바로 시장민주주의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키운 자식 같은 기업을 외국에서 들어온 기업에 헐값에 뺏기는 일이 비일비재할 겁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할 이 중요한 시점에, 선거를 앞두고 있다고 정치권에서 너무 기업을 옥죄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

▷신원은 중견기업에 속하는데,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요.

“동반성장이라고 해서 ‘일의 균등 분배’ 개념으로 접근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업종에 따라 기술투자비, 연구비 같은 생산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기업이 있는데 단순하게 ‘공생’하라고 한쪽으로 일을 몰아주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공장 한 곳에 일을 몰아준다면 시장가격이 형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품질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공생해야 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그 의미가 업종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

▷신원의 포트폴리오 중 남성복은 고가·중가 라인업을 갖췄는데, 여성복은 고가 라인이 비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부적으로 ‘반하트’ 급의 최고급 여성복 브랜드를 준비 중입니다. 최고의 품질과 그에 맞는 가격,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명품 여성복을 내놓을 겁니다. 아직 구체적인 건 진행된 게 없지만 중국은 물론 유럽, 북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야심작으로 신중하게 만들 참입니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