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몸에 있는 혈관을 한 줄로 이으면 12만㎞나 된다. 대략 지구 둘레의 세 배다. 심장에서 출발한 피는 불과 몇 분 만에 온몸을 한 바퀴 돈다. 피가 몸속을 돈다는 ‘혈액 순환설’은 17세기에 와서야 영국 해부학자 윌리엄 하비에 의해 제기됐다. 그 이전까지는 피가 간에서 생성돼 심장을 통해 온 몸으로 퍼져 오줌과 땀으로 배출된다고 믿었다. 로마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주치의 갈레노스가 주장한 이른바 ‘체액설’이 1500여년이나 유지됐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처럼 혈액 순환설도 처음엔 수난을 겪었다. 하비가 아무리 분명한 증거를 내놔도 주류 학자들은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스승 파브리치우스조차 대놓고 하비를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순환설은 정설로 인정받았으나 수혈이 이뤄진 건 그로부터 190년이 지난 후였다. 1818년 제임스 블런델이라는 영국의사가 여러 기증자로부터 채혈한 피를 위암 환자에게 수혈했다. 환자는 증세가 나아지는 듯하다가 56시간 후 사망하고 말았다.

수혈에 처음 성공한 건 1822년이다. 분만 후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산모를 조수에게서 받아낸 피로 살려냈다. 수혈 성공률은 1901년 오스트리아 면역학자 란트슈타이너가 ABO식 혈액형을 발견하면서 크게 높아졌다. 오늘은 란트슈타이너 탄생을 기념해 제정된 ‘세계 헌혈자의 날’이다. 아무 보상도 없이 헌혈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날이다.

우리나라 헌혈인구는 2008년 230만명에서 2009년 250만명, 2010년 260만여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헌혈률도 5.5%로 독일(6.7%) 호주(6.1%)보다는 낮지만 미국(5.1%) 일본(4.2%)보다는 높다. 그래도 안전한 수준이라는 300만명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 헌혈자의 70~80%가 10~20대에 편중된 것도 문제다. 헌혈로 봉사활동을 인정받으려는 학생들이나 군인들의 단체헌혈이 많아 계절에 따라 ‘피 가뭄’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30대 이상의 자발적 헌혈은 20%대에 머물고 있다.

몸속 혈액의 15%는 비상시에 대비한 여유분이다. 헌혈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건강에 별 지장이 없는 이유다. 헌혈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 비해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현저히 낮다는 연구결과(미국 캔자스대, 핀란드 쿠오피오 공중보건연구소)도 있다. 피를 빼면 심장병 위험을 높이는 몸속 철분농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란다. 중환자에게 주어지는 피는 생명수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헌혈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게 진짜 선의(善意)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