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우리회사  불문율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 회사에도 나름의 사규가 있다. 명문화된 규율 외에도 ‘불문율’ ‘금기’ ‘터부’로 불리는 보이지 않는 룰들이 존재한다. ‘남다른 담대함’으로 이를 무시하거나 ‘깔끔한 무개념’으로 눈치없이 굴다가는 능력과 무관한 평가를 받거나 사내 불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정수기 회사에서는 “물 먹었다”는 표현이 금기다.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우연한 사고일지라도 계속 반복되면 금기가 된다.

○식품회사 근무복엔 주머니가 없다

고객 불만에 민감한 소비재 기업들에는 이색적인 규율이 많다. 국내 최대 라면업체인 농심의 공장에는 두 가지가 없다. 우선 근무복에 주머니가 없다. 휴대폰이나 볼펜과 같은 주머니 소지품을 통해서도 제품에 이물질이 들어갈 우려가 있어 근무복의 위아래 주머니를 모두 박음질 처리로 ‘원천 봉쇄’해 버렸다. 생산직 직원들은 공장 초입의 개인 사물함에 모든 소지품을 두고, 주머니를 완전히 비운 채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또 농심 공장에서는 스테이플러도 찾아볼 수 없다. 심이 작고 색도 회색으로 눈에 잘 띄지 않아 이 역시 요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스테이플러를 쓰지 않는 대신 풀을 사용한다. 수십 장의 문서를 풀로 한 장 한 장 붙일 때는 해당 직원이 좀 애를 먹긴 하지만, 제품 안전을 생각하면 좋은 아이디어라는 공감대가 있다고 한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청소기 부품업체는 사내로 스마트폰 반입이 안 된다. 스마트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장의 ‘엄명’에 따른 것이다. 이 회사 사장은 스마트폰으로 웹검색, 채팅, 게임 등을 하다 보니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못마땅하게 여긴다. 스마트폰을 지닌 직원들은 출근할 때 입구 경비실에 맡긴 후 퇴근 때 찾아가야 한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반 피처폰을 가져온 뒤 스마트폰에서 유심(USIM)카드를 빼내 피처폰에 끼운 뒤 사내에서 사용한다. 이 회사 경비실에는 출퇴근 때마다 직원들이 저마다 휴대폰 유심카드를 교체하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회식을 무조건 고깃집에서 하는 까닭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박 과장은 입사 이후 회사에서 한번도 고기를 먹어 보지 못했다. 100여명의 직원들이 매일 점심을 먹는 구내식당에서 단 한번도 소고기와 돼지고기 반찬이 올라온 적이 없다. 이 회사 C 회장은 채식주의자인 데다 독실한 이슬람교신자다. “이슬람교 자체에 대한 편견이나 어색함은 없어요. 회사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종교에 대한 신념을 구내식당 메뉴에 반영하는 회장님 때문에 고기반찬을 구경해본적이 없다는 게 서글플 따름이죠.” 이 회사 직원들의 저녁 회식 장소는 무조건 고깃집이다.

한 전자업체 기획팀에선 보고서를 쓸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보고서에 색을 넣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팀장부터 사장까지 대부분의 상사들이 보고서에 분홍색, 파란색 등 화려한 색깔을 넣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과거 이런 사정을 모르는 한 유학파 팀원이 자신의 취향대로 보고서에 온갖 컬러를 넣다 팀장에게 크게 깨지고 난 뒤 퇴사해 버린 ‘사건’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선배들이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 중 하나도 보고서 작성 매뉴얼이다.

○노처녀 박 부장의 4대 금기사항은

올초 대형 유통업체에 입사한 정모씨는 최근 부서 회식에서 지난 주말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얘기를 꺼내려다 바로 위 사수인 이 대리에게 불려 나왔다. 부서에서 남자친구 얘기는 웬만하면 하지 말라는 게 이 대리의 조언. 이유는 이제 50대로 접어든 박 부장부터 30대 중반이 된 김 과장까지 부서원 10명 중 6명이 이른바 노처녀이기 때문이다. 특히 ‘왕언니’ 부장 앞에서는 각별히 조심하라는 ‘옐로 카드’를 받았다. 얼마 전 박 부장에게 눈치 없이 결혼과 자식 얘기를 늘어 놓던 한 거래처 직원은 그 탓인지 거래 계약 연장을 못했다고 한다.

정씨가 이 대리에게서 들은 이 부서의 금기는 다음과 같다. △카카오톡에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 올리기 금지 △남자친구와 했던 데이트 얘기 금지 △기념일이나 주말에 서로 뭐했는지 물어보기 금지 △부서로 남자친구 꽃배달 금지까지. 물론 박 부장을 설레게 할 소개팅을 해 줄 자신이 있는 경우만은 예외다.

○금속회사 L사 직원들 ‘멍멍탕’이 무서워

비철금속 업체인 L사 공장 직원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반복되는 우연이 금기가 된 사례의 하나다. 10여년 전 보신탕집에서 부서회식을 하고 난 뒤 귀갓길에 교통 사고로 여러 사람이 다친 일이 있다. 그 이후에도 부서 회식 메뉴를 보신탕으로 고를 때마다 공교롭게도 사람들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보신탕=사고’라는 금기가 생겼고, 공장장은 회식 메뉴에서 개고기는 아예 빼버리게 됐다. 이 회사 한 직원의 전언. “개인적으로 보신탕을 즐기는 직원들도 있겠지만, 일단 3명 이상만 모여도 꺼리게 됩니다. ‘순도’를 중시하는 금속 제련업과 개고기는 궁합이 안 맞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드네요.”

윤정현/고경봉/강경민/김일규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