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5·16과 5·18 되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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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가르기식 이분법 평가는 위험…다양성 속 균형 잡힌 시각 필요
함인희 <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hih@ewha.ac.kr >
함인희 <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hih@ewha.ac.kr >
2000년은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남북간 화해 무드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당시 국민들의 통일의식을 주제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북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기술해달라는 설문에 대해, 여전히 판문점 도끼 만행, 푸에블로호 납북, 간첩 김신조, 무장공비 남파 등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남북정상이 손을 맞잡은 상황에서도 반공세대의 기억 속에 각인된 북한의 이미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셈이다.
역시 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한 인기가수의 뮤직 비디오를 둘러싸고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사건이 있었다. 백마부대 용사로 베트남에 파병된 일병이 현지 여인과 사랑에 빠지나 결국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의 뮤직 비디오를 둘러싸고, 육군본부 측에선 “비디오 내용은 사실무근으로 군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기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부대 마크를 무단 사용한 것은 위법”이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음반 제작사 측에선 “뮤직 비디오는 픽션이며, 소대원들의 전멸 장면은 스토리 구성상 하이라이트이기에 수정이 불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양측 간 공방이 가열되는 가운데 월남참전전우회 소속 용사들이 당시의 군복을 입고 문제의 음반회사를 찾아가 격렬히 항의했던 이 사건은 겉으로 드러난 해프닝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다.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행동 속엔, ‘명백한 국익’을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불사했던 자신들의 희생이 그 의미를 조망받기는커녕 용병으로 폄하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뿌리 깊게 깔려 있었던 셈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던 E H 카의 명언은 특별히 한국의 현대사에서 빛을 발하는 듯하다. 수 명의 대통령만 거슬러 올라가도 5·16 뒤에 ‘혁명’이란 명예(?)가 부여되고 5·16 민족상 수상이 큰 영예로 인식되곤 했었는데, 어느새 5·16 뒤엔 ‘실패한 쿠데타’란 오명이 붙고 조국 근대화를 명분으로 한 개발독재와 유신체제, 나아가 광주민주화항쟁의 근원으로까지 자리매김되고 있음에랴.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새롭게 재해석되는 과정의 역동성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의미 평가 작업에 담긴 단순명료한 이분법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내편=옳음, 네편=그름’ 식의 위험성을 필히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지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세력권 다툼에서 어이없이 희생된 비극의 역사가 드러나기도 하고, 가장 비인간적인 수용소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애의 정수가 꽃피던 감동을 경험하기도 한다. 왜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는가 뼈아픈 성찰이 이어지는가 하면, 지극히 나이브했던 당시의 현실인식에 대한 자성도 등장한다. 혹 집단학살의 공포가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미묘한 형태로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드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경계하며 역사의 오류가 반복되지 않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과거는 항상 전면적 부인(否認)의 대상이 되는 역사, 아니면 일정한 시간이 흘러 “이제야 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궁색한 역사라면 어찌 역사라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과거가 늘 극복의 대상이 되는 역사, 역사의 오류가 시간이 지나 폭로의 형식으로 기억되는 사회라면 별 희망이 없는 것일 게다.
과거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는 순간의 감동과 흥분도 좋지만, 어느 한 편이 지나치게 윤색되거나 평가절하되는 오류 또한 경계해야 하리란 생각이다. 나아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사회 전체 구성원이 일사불란하게 동일한 의견을 갖는 상황은 오히려 내 편 네편 가려 분열되는 상황보다 더욱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5·16에 대한 해석과 5·18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이 다양할수록 이분법의 경직성은 완화되고,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하나씩 풀리리란 확신 하에 5·16이든 5·18이든 그 의미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재조명해 보는 노력이 절실한 때다.
함인희 <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hih@ewha.ac.kr >
역시 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한 인기가수의 뮤직 비디오를 둘러싸고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사건이 있었다. 백마부대 용사로 베트남에 파병된 일병이 현지 여인과 사랑에 빠지나 결국은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의 뮤직 비디오를 둘러싸고, 육군본부 측에선 “비디오 내용은 사실무근으로 군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기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부대 마크를 무단 사용한 것은 위법”이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음반 제작사 측에선 “뮤직 비디오는 픽션이며, 소대원들의 전멸 장면은 스토리 구성상 하이라이트이기에 수정이 불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양측 간 공방이 가열되는 가운데 월남참전전우회 소속 용사들이 당시의 군복을 입고 문제의 음반회사를 찾아가 격렬히 항의했던 이 사건은 겉으로 드러난 해프닝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다.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행동 속엔, ‘명백한 국익’을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불사했던 자신들의 희생이 그 의미를 조망받기는커녕 용병으로 폄하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뿌리 깊게 깔려 있었던 셈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던 E H 카의 명언은 특별히 한국의 현대사에서 빛을 발하는 듯하다. 수 명의 대통령만 거슬러 올라가도 5·16 뒤에 ‘혁명’이란 명예(?)가 부여되고 5·16 민족상 수상이 큰 영예로 인식되곤 했었는데, 어느새 5·16 뒤엔 ‘실패한 쿠데타’란 오명이 붙고 조국 근대화를 명분으로 한 개발독재와 유신체제, 나아가 광주민주화항쟁의 근원으로까지 자리매김되고 있음에랴.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새롭게 재해석되는 과정의 역동성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의미 평가 작업에 담긴 단순명료한 이분법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내편=옳음, 네편=그름’ 식의 위험성을 필히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지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세력권 다툼에서 어이없이 희생된 비극의 역사가 드러나기도 하고, 가장 비인간적인 수용소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애의 정수가 꽃피던 감동을 경험하기도 한다. 왜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는가 뼈아픈 성찰이 이어지는가 하면, 지극히 나이브했던 당시의 현실인식에 대한 자성도 등장한다. 혹 집단학살의 공포가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채 미묘한 형태로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드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경계하며 역사의 오류가 반복되지 않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과거는 항상 전면적 부인(否認)의 대상이 되는 역사, 아니면 일정한 시간이 흘러 “이제야 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궁색한 역사라면 어찌 역사라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과거가 늘 극복의 대상이 되는 역사, 역사의 오류가 시간이 지나 폭로의 형식으로 기억되는 사회라면 별 희망이 없는 것일 게다.
과거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는 순간의 감동과 흥분도 좋지만, 어느 한 편이 지나치게 윤색되거나 평가절하되는 오류 또한 경계해야 하리란 생각이다. 나아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사회 전체 구성원이 일사불란하게 동일한 의견을 갖는 상황은 오히려 내 편 네편 가려 분열되는 상황보다 더욱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5·16에 대한 해석과 5·18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이 다양할수록 이분법의 경직성은 완화되고,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하나씩 풀리리란 확신 하에 5·16이든 5·18이든 그 의미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재조명해 보는 노력이 절실한 때다.
함인희 <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hih@ewh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