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입사해 30년 가까이 인력 채용 업무를 맡은 원기찬 삼성전자 인사팀장(부사장·53). 매년 1만명 이상 신규 인력을 뽑는 인사 분야의 베테랑인 만큼 어지간한 인재를 보고는 놀라지도 않는다. 1997년 삼성전자의 첫 외국인 임원인 데이비드 스틸 전무를 영입할 때나 지난해 구글의 핵심 인력 데이비드 은 부사장을 데려올 때도 무덤덤했다.

그런 그가 요즘엔 감동에 빠져있다고 했다. 특급 대우를 받는 S급 인재 때문이 아니다. 아들딸뻘 되는 고졸 인력들이 주인공이다. 30 대 1에 가까운 좁은 문을 뚫고 9일 삼성그룹 고졸 공채에 합격한 이들의 이야기는 원 부사장에겐 모두 한 편의 드라마였다.

원 부사장은 “우수한 고졸 인력들을 보니 잘하면 3년 내에 학력 중심의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뀔 것 같다”고 했다.

시쳇말로 ‘완전 감동 먹은’ 원 부사장의 제안 등으로 삼성은 올해 처음 실시한 그룹 차원의 고졸 공채 인원을 당초 계획보다 100명 많은 700명으로 늘렸다.

이인용 삼성그룹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적극적인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한 고졸자들이 너무 많아 이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면 열정적으로 일할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입사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등 진취적인 지원자들이 많아 면접위원들이 모두 감동받았다”고 전했다.

고3인 김모군이 대표적이다. 김군이 어릴 때 어머니는 가출했고 어부인 아버지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김군은 소년가장으로 투병 중인 할아버지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함께했다. 열심히 돌봤지만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졌다. 그것도 하필 어렵게 지원한 삼성 고졸 공채 면접 전날이었다. 김군은 삼성카드에 입사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상중에 면접에 참석, 최종 합격자 명단에 들었다.

군 제대 후 20대 초반의 나이로 삼성전자 소프트웨어직에 합격한 김모씨도 고학생이었다. 김씨는 중학생 때 암으로 어머니를 잃고 공고에 진학했다. 성적은 상위권이었는데도 장기간 병원비를 대느라 가세가 기울어서다. 그래도 기죽지 않으려 노력했다. 힘들 때마다 강한 인내심으로 투병했던 어머니 모습을 생각했고 “열심히 살아달라”는 유언을 떠올리며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여모씨(28·여)도 어렵게 고졸 공채 벽을 넘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2 때 중퇴했고 고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대학에 가기 위해 10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오를 대로 오른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삼성 고졸 공채에 응시, 고교 졸업 후 10년 만에 삼성화재 사무직 사원이 됐다.

자발적으로 대학 입학을 단념한 합격자도 있었다. 우등생인 고3 김모양은 고졸 학력으로 삼성에 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천시 인일여고에서 성적으로 10%대에 들어 수도권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이론보다 기업에서 실무를 배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삼성SDS에 들어가 회계 분야 여성 리더가 되겠다는 게 김양의 포부다.

원 부사장은 “김양은 입사해서 필요하면 대학 공부를 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며 “내가 저 나이에 이런 소신이 있었는지 자문해봤는데 없었다”고 놀라워했다. 그는 “그동안 학력을 철폐하고 능력 위주로 가자고 말만 했지 사회적으로 동력이 약했는데 이번에 희망을 찾았다”며 “잘하면 3년 내에 학력 중심인 사회가 바뀔 것 같다”고 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