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해 계간 ‘시인세계’ 설문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가 뽑혔다. 감수성 예민한 시인들이라 온 산하에 새순과 꽃이 합창하듯 피어나는 봄속에서 덧없음을 읽었던 것일까. 고향 뒷산에 진달래가 지천이었다는 천양희 시인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라는 구절을 부를 땐 아무렇지도 않다가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울던’이란 대목에선 눈물이 나려 했다고 털어놨다.
김종철은 ‘봄날은 간다’라는 시에서 꽃이 지고 난 나머지 시간도 감당해야 하는 게 삶이란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한 스무 해쯤 꽃 진 자리에/ 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일 마음 같진 않지만/ 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 깨침에 꽃 피었다/ 가진 것 다 잃어버린/ 저기 저, 발가숭이 봄!/ 쯧쯧’. 선운사 상사화를 보고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라는 시를 쓴 이는 김소연이다. ‘꽃이 지고 잎이 난다/ 꽃이 져서 잎이 난다/ 꽃이 져야/ 잎이 난다….’ 그릇을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듯 꽃이 져야 잎이 나고 새 생명이 솟는다는 뜻일 게다.
MB정부 권력의 한 축을 이뤘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서울 양재동 복합물류단지 인허가과정에서 거액을 챙긴 혐의다.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도 거론되고 있다.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도 금품 수수죄로 수감돼 있다. 비리로 얼룩진 권력의 종반을 지켜봐야 하는 게 전두환 정권 이후 벌써 6번째다.
활짝 피었던 꽃들이 어제의 비바람으로 꽤 떨어졌다. 잎의 녹색도 짙어졌다. 봄이 가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은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고 마음을 추스렸다. 이형기는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고 했다. 덧 없이 가는 게 봄날뿐일까. 때가 되면 권력도 진다. 연말 대권을 향한 레이스도 슬슬 시작되고 있다. 권력을 잡기 전이든, 후든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 일이다. 언젠가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