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주석은 덩샤오핑이 직접 발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개혁·개방과 성장을 중시하는 장쩌민 전 주석과 달리 분배와 원칙을 중시하는 후 주석이 장 전 주석에게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상하이방의 거두인 장 전 주석은 퇴임 후에도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후 주석과 장 전 주석 중 누구의 권력이 더 센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할 정도다.

후 주석은 최고 지도자에 오른 후에도 끊임없이 상하이방 세력의 견제를 받았다. 장 전 주석은 2002년 퇴임하면서 자신의 심복인 유시구이(由喜貴)가 후 주석의 경위국장(경호실장) 자리를 계속 맡도록 했다. 장 전 주석의 막강한 권력 아래 숨죽이고 있던 후 주석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권총을 찬 장 전 주석의 심복이 후 주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후 주석은 경호실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하는 데 5년이 걸렸다. 비서실장 격인 중앙판공청 주임도 장 전 주석의 측근인 왕강이 계속 맡다가 2007년에야 교체됐다. 집권 초기 후 주석은 손과 발을 장 전 주석에게 잡혔던 셈이다.

장 전 주석은 또 주요 자리 곳곳에 자신의 사람을 배치했다. 최고 권력집단인 정치국 상무위원 수를 7명에서 9명으로 늘리면서 상하이방과 태자당 사람들을 집어넣었다. 16대 상무위원에는 공청단 출신이 후 주석 1인이었고, 집권 2기인 17대에는 리커창 부총리가 새로 편입돼 둘로 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6(상하이방+태자당) 대 2(공청단파)로 절대적 열세다. 원자바오 총리는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지만 친 후진타오계로 분류된다.

그러나 공청단파는 집권기간 중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던 천량위 상하이시 서기와 태자당의 선두주자인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를 침몰시키는 등 국지적으로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꾸준히 승리했다. 황광위 전 궈메이 회장 사건을 빌미로 상하이방과 태자당 출신의 부패한 고위관리를 제거하기도 했다. 후춘화 등 40대 성장과 성 서기를 잇따라 배출하며 차차기를 준비하는 치밀함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올해 가을에 열리는 18차 공산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놓고 공청단이 상하이방 및 태자당과 싸워 몇 자리를 확보하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은 성장 우선 정책을, 공청단은 분배와 성장의 균형을 강조하는 등 경제발전 노선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번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 해임에서 보듯 3대 계파는 공산당 집권 기반의 안정이라는 절대적 원칙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묵계를 갖고 있다.

베이징=김태완 특파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