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가족과의 약속
얼마 전 일이다. 다음날이 공휴일인 까닭에 밤에 집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때르릉….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경림아, 내일 내가 모 프로그램에 초대손님으로 나가는데, 너 깜짝손님으로 좀 나와줄 수 있겠니?” 상대는 그야말로 내가 가족처럼 생각하는 나의 절친이었다.

“어…내가 내일 가족이랑 일이 좀 있긴 한데 시간 맞춰 갈게.” 전화를 끊고, 옆에 있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는데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우리…약속 있잖아….” 물론 나도 순간적으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가족과 교외로 바람 쐬러 가기로 했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상대는 늘 나를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인데 어떡하지? 그래 내가 좀 부지런히 서둘러서 일찍 갔다가 일찍 오면 되겠지…. 그 짧은 순간에도 많은 생각을 하고 대답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 바로 가족의 마음이다. 되돌아 보면 사실 이런 일은 그동안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방송일을 시작한 지 15년 동안 수없이 많이 가족과의 약속을 뒤로 한 채 다른 스케줄이나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늘 가족은 이해해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끔 그러셨다. “다음주 주말에는 우리 가족 모두 김밥이라도 싸서 놀러가자.” 그 말씀에 1주일간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 “우리 경림이 이번주 일요일에 아빠가 인형가게 가서 인형 사줄게.” 그럼 난 그날부터 들뜨고 설레서 잠을 잘 못 잤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리고 정작 그날이 됐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약속이 미뤄지거나 일이 늦어져서 아예 그 약속이 없어져 버렸을 때의 절망감과 섭섭함이란…. 난 왜 그때의 그 마음을 자라고 나서 잊고 있었을까. 분명 다르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15년 동안 한번도 방송 스케줄을 어긴 적이 없다고 자부하던 내 마음이 갑자기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번진다. 무조건이란 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은 무조건 양보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도 이젠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가족도 분명히 많이 섭섭하고 많이 속상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깨닫게 돼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이젠 가족과의 약속도 방송 스케줄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일, 직장인들이 보고서를 쓰는 일, 그리고 내가 녹화를 하는 일처럼 가족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가족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스케줄은 일찍부터 일어나 아이와 ‘격하게’ 놀아주고 저녁 때 나만 먼저 서둘러 나옴으로써 방송 스케줄도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박경림 < 방송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