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한국 가구박물관
래리 델리는 착하지만 어리숙한 인물. 하는 일마다 안돼 이혼하지만 아들 닉에겐 떳떳 하고자 직장을 구한다. 겨우 얻은 일자리는 자연사박물관 야간경비원. 그러나 첫날부터 기막힌 상황에 부딪친다. 밤이 되자 박물관의 모든 전시품이 살아 움직이는 것.

티라노사우루스는 잡아먹겠다고 덤비고, 네안데르탈인은 물건을 불태우고, 원숭이는 열쇠를 훔치고, 로마의 검투사와 카우보이들은 싸움판을 벌인다. 당황한 그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은 조언한다. “역사를 공부하라. 이유를 알면 대처할 수 있다.”

영화 ‘박물관은 살아 있다’는 할리우드의 핵심 주제 두 가지를 다룬다. 가족애와 역사의식이 그것이다. 영화는 안타까운 부정(父情)과 함께 네안데르탈인의 생활부터 로마의 이집트 정벌, 스페인의 남미 정복, 미국의 서부 개척까지 두루 보여준다. 오늘의 세계가 우연히 이뤄진 게 아니란 얘기다.

박물관이 그저 과거의 흔적만 모아 놓은 죽은 공간이 아니라 선인들의 삶과 지혜를 전하는 산 공간임도 일깨운다.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영화에서처럼 말하지 않아도 제각기 그때 그 시절의 사연을 들려준다.

서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도 다르지 않다. 한옥 곳곳의 옛 가구들은 앞에 선 이들에게 저마다 속삭인다. 안방에 놓인 장과 농·문갑·경대·반닫이는 깔끔하던 마님의 성품을, 사랑채의 책장과 책함·책상·고비는 밤낮없이 공부하던 선비의 열정을 전한다.

박물관은 고(故) 정일형·이태영 박사의 딸로 가구와 한옥을 공부한 정미숙씨가 필생의 사업으로 마련한 곳. 1995년 첫삽을 뜬 뒤 17년 만인 이달 중순 개관한다. 전시작은 안방·사랑방·건넌방 가구 및 찬장·뒤주·탁자·소반 등 부엌 가구까지 500여점.

말이 쉬워 가구지 전시작들은 실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미닫이와 여닫이 문을 배합한 이층농, 약의 필요도에 따라 서랍을 통짜와 이등분짜리로 나누고 비약 서랍은 감춘 약장, 지역별로 다른 반닫이, 들고 다니기 좋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책함, 튼튼하도록 두꺼운 판재를 쓰되 테두리는 얇게 깎은 탁자는 선조들의 탁월한 미적 감각을 드러내고도 남는다.

가구 사이사이 놓인 민화 또한 바쁜 일상에 쫓겨 허둥대는 삭막한 삶에 웃음과 여유를 가져다 준다. 한여름 손님을 맞을 때 썼다는 물고기 병풍, 길·흉사에 모두 사용했다는 양면 병풍 등. 섬세함과 대담함, 실용성과 예술성이 어우러진 전통가구에 감탄하고, 호방하고 유머러스한 민화에 미소짓다 보면 가슴을 짓누르던 현실의 고달픔도 까맣게 잊혀진다. 눈과 마음의 호강이 따로 없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