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유학의 추억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젊은시절 봉사와 시민정신 배워…직업관 일깨운 지도교수 못잊어
김현 <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 hyunkim@sechanglaw.com >
김현 <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 hyunkim@sechanglaw.com >
봉사정신을 배웠다. 외국에 처음 간 나를 돌봐준 사람은 은퇴한 뱅스 교수이다. 공항에서 나를 맞아 댁에서 재운 다음 기숙사에 안내해주고 차 구입, 보험가입, 은행계좌 개설, 전화 가설을 도와주고 주말마다 인근 구경을 시켜주고 격려해주셨다.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엔 댁에서 만찬을 베풀어 주셨다. 이타카에 처음 도착해 하룻밤 자고 교수님 댁에서 아침을 먹는데 그럴 듯한 식사를 기대했던 내게 나온 것은 시리얼과 찬 우유 한 잔뿐. 시리얼을 처음 맛보았는데 손님에게도 평소처럼 소박하게 대접하는 가식 없고 따뜻한 실용주의를 느꼈다.
싼 차를 몰다가 고장이 자주 나 애를 먹었다. 운전 중 시동이 꺼져 내가 보닛을 열고 들여다 보노라면 누군가 반드시 다가와 도와준다. 도와줄 수 없으면 견인차라도 불러준다. 그때 기억이 나서, 길에서 외국인이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면 필자는 반드시 다가가 ‘도와드릴까요’ 하고 말을 건다. 도움받은 외국인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즐거움이란!
미국인의 정직함과 시민정신도 인상 깊다. 게시판에 좋은 분실물 손목시계가 걸려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샐리라는 중년 교직원이 있었는데 선량하고 온화하나 일처리가 원칙적이고 깔끔한 여성이었다. 샐리가 법원으로부터 배심원에 선정돼 법정에 출석하게 됐다. 같은 학교를 다녔는지 또는 이웃인지가 샐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오로지 양심과 증거에 입각해 판단했을 것이다.
헨더슨 워싱턴대 지도교수한테서 투철한 직업정신을 보았다. 밤 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님은 일본 대법원장과 일본 민사소송법 공저를 낸 세계적 학자이시다. 내가 논문 초안을 제출하면 1주일 후 교수님은 내가 쓴 것과 같은 분량의 빨간 글씨로 코멘트를 해 돌려주신다. 이 논문은 읽었느냐, 새 판례가 나왔는데 보았느냐, 이런 식이다. 나와 함께 연구를 하시는 것이다.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간신히 논문을 완성하자 교수님은 댁에 저녁 초대를 해주시고 다시 자애로운 스승으로 돌아오셨다. 교수님께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주에 모시고 가 안내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수년 전 작고하셨는데, 엄격한 지도로 나를 발전시켜주신 교수님이 보고 싶다.
김현 <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 hyunkim@sechanglaw.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