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사태로 한국거래소의 공시 제도에 커다란 구멍이 확인됐지만 거래소는 후속 대책 마련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검찰과 특별한 정보 교류가 없는 현행 공시 제도 하에서는 상장사 임원들의 횡령· 배임 혐의 등이 은폐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여 개선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한화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 임원 5명이 지난해 1월 29일 횡령·배임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는 사실을 1년이나 지난 지난 3일에야 늑장공시했다. 대기업의 경우 자기자본금액 대비 2.5% 이상 넘는 금액과 관련해 횡령·배임 혐의가 불거지면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김 회장 등의 횡령·배임 혐의금액은 899억2100만원으로 한화의 2009년 말 자기자본 대비 3.88%에 해당하는 규모다.

한화가 김 회장의 피기소 사실을 1년 동안이나 숨길 수 있었던 것은 거래소의 공시시스템에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거래소 측은 지난해 1월 당시 김 회장의 기소 사실이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됐음에도 불구하고 조회공시를 요구하지 않은 데 대해 "당시 검찰의 수사가 한화그룹의 어느 계열사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지 몰랐다"라며 발을 뺐다.

지난 3일 검찰이 김 회장에게 징역 9년, 벌금 1500억원을 구형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이 사건이 한화의 의무 공시에 해당한다는 사살에 눈치챘다는 것이다. 거래소가 부랴부랴 회사 측에 공시를 요구해 이날 저녁 한화의 횡령·배임 혐의 발생 공시가 나오게 됐다.

만약 한화와 같은 대기업이 아니어서 검찰의 구형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면 전혀 모르고 지나갔을 뻔한 일이었다.

현재 제도상 검찰이 상장사 임원을 대상으로 기소한다고 해서 별도로 거래소에 통보해 주는 경우는 없다.

검찰 기소 사실은 거래소가 언론의 보도 등을 통해 소식을 접한 뒤 기소를 제기한 검사 개인에게 직접 자료를 요청하고 있다. 이후 기소가 사실로 확인되면 기업에 조회공시를 요구하는 순이다. 검찰이 기소 사실을 보도자료로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을 합쳐 상장사가 1700여곳에 달하지만 공시 담당 직원과 시장 감시 직원 약 50명이 일일이 정보를 구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임원 등 개인의 비리가 일어난 경우 더욱 알아채기 힘들다. 회사가 아니라 경영진 개인을 상대로 검찰이 기소할 경우 기소장이 개인에게만 송부되기 때문에 회사에 적시에 공시하지 않은 책임을 묻더라도 '임원이 말을 해주지 않아 기소 사실을 몰랐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검찰과 정보 교류 체제가 갖춰져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거래소 측은 "기소장에는 개인정보가 들어 있어 검찰이 (거래소에) 넘기는 것을 꺼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검찰이 상장사와 기소된 임원 이름, 횡령·배임 혐의 관련 금액만 통보해주면 거래소는 조회공시 요구 등을 통해 관련 자료를 기업에 요청할 수 있다.

김기영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 공시제도팀장은 "은행이 기업의 부도 사실을 거래소에 통보해주는 자본시장법 392조도 도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라며 "검찰의 기소 사실을 자동으로 전달받을 수 있다면 공시 업무가 한층 수월해지겠지만 유관기관과의 협조 사항이기 때문에 제도로 정착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한화 사태와 관련해 공시 제도를 개선할 여러가지 방안들을 실무진들이 논의 중"이라며 "제도 개선은 감독 당국과 협의해야 하는 사안이라 하루 아침에 이뤄지진 않겠지만 가능한 빨리 결론을 내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논의 중인 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밝힐 수 없다"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한경닷컴 정인지 기자 inj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