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죄벌(罪閥) 만들기' 저주의 굿판
‘명예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돈만 벌면 끝인 거예요.’ 네이버에 올라 있는 ‘재벌(財閥)’에 대한 ‘애정남’식 정의다. 네이버 ‘지식in’은 애매한 것을 정해준다며 ‘8시 황금 시간대에 휠체어를 타고 TV뉴스에 떴다. 이거 재벌이다’라고 나름의 기준도 제시한다.

이쯤이면 두차례 명운을 건 선거를 앞두고 있는 정치권은 ‘재벌’이라는 용어를 의도하는 방향대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듯하다. 탐욕에 빠져 있고 문어발을 휘둘러대며 서민 삶을 어렵게 만드는 주범으로 말이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실정과 무능, 부패를 향해 쏟아지는 분노와 원망의 화살을 영악하게 ‘재벌’ 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들이 사려없이 뱉어내는 재벌이라는 말을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네이버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경쟁적 대기업 옥죄기 공언

대기업 2,3세 딸들의 ‘빵집 논란’ 틈에서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물론 집권당인 한나라당까지 ‘경제 민주화 실현’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정강·정책을 뜯어고치고 있다. 시장에 적극 개입해 대기업의 과도한 영향력을 제한하겠다는 공언을 경쟁하듯 쏟아낸다.

기업 활동과 일자리 창출에 족쇄가 되는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자유시장주의 논리는 이미 설자리를 잃었다. 이대로 간다면 ‘재벌 사냥’의 선봉을 맡을 완장 찬 정치인과 관료들의 어깨에 힘이 잔뜩 실리고, 기업인들은 죄인처럼 눈치를 보는데 더 바빠질 게 뻔하다.

따지고 보면 재벌은 한국의 고질적 정경유착 풍토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며 기형아였다. 정권의 시혜적 특혜와 검은 정치자금이 결합하고, 일부 대기업은 한때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금권’을 행사해온 일을 부정할 수 없다. 2,3세 승계 과정에서 편법을 썼다는 비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아직도 대기업 집단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 독재’를 일삼는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정치자금을 풀어놓고 편안하게 사업하겠다는 대기업이나 기업주가 없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선거철마다 대기업 공격에 열을 올리는 것은 기업의 투명경영으로 돈줄이 막힌 정치권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대기업이 경제 독재집단인가

글로벌 시장에서 생사를 건 일전을 치르고 있는 국내 간판 기업들을 싸잡아 ‘골목대장’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자신들의 자녀를 대기업에 취업시키려 힘쓰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안 가려 한다고 탓하는 이중잣대도 씁쓸하다. 동네빵집, 골목 상권을 살리는 정책적 고민엔 큰 관심이 없다. 재벌 탓이 해법이기 때문인가.

글로벌 기업 경쟁의 결과는 참혹하다. 일본 전자업체 NEC는 휴대폰 부진으로 1만명을 또 감원한다. 30년 만에 첫 적자를 낸 게임업체 닌텐도에 애플이 만든 스마트 세상은 공포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올해 국정연설에서 “새로운 미국을 위한 청사진은 제조업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제조업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엔 다 이유가 있다.

우리 정치는 무엇으로 희망을 만들 작정인가. 애정남이 한국 정치를 이렇게 정의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국익, 염치 이런거 필요없어요, 남탓하며 그때 그때 표만 챙기면 그만이에요~’.

유근석 산업부장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