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 잔혹사(2004년)’ ‘친구(2001년)’ ‘여고괴담(1998년)’.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끈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폭력과 왕따(집단 따돌림)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권상우(말죽거리 잔혹사)는 차별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강한 폭력을 선택한다. ‘친구’에 나오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뭐하시노?”를 물으며 무차별 폭력을 가한다. 왕따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여고생이 원귀(寃鬼)로 변해 복수한다는 스토리의 ‘여고괴담’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연말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을 계기로 나라가 시끄럽다. 학교는 나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복마전(伏魔殿)으로 변하고 교사는 무능력자로, 학부모는 이기적인 방관자로 전락한 듯하다. 주무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는 새해 벽두부터 비상이 걸렸다. 부랴부랴 ‘학교폭력근절팀’을 신설하고 민관 합동으로 ‘학교폭력 근절 자문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해외출장을 취소한 채 연일 학교에서 살다시피한다. 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이 장관은 세계교육포럼(영국 런던)에서 한국 교육체계와 인재 육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있었을 것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

각 시·도 교육청들도 태스크포스(TF)를 구성,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국회 총리실 검찰 경찰청 지방자치단체까지 나서 처음 보는 신종 괴물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야단법석이다. 학교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꼭꼭 감춰뒀던 상처가 갑자기 곪아터졌기 때문이다.

사회의 외면 속에 학교폭력은 지능화·조직화·흉포화됐다. 그 심각성은 ‘빵셔틀’ ‘담배셔틀’에서 보듯 ‘셔틀’이라는 용어에 잘 나타나 있다. 위키백과사전 한국어판은 ‘셔틀’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친구를 강제로 부리는 형태의 학교폭력’이라고 정의할 정도다. 최근에는 ‘와이파이셔틀’까지 생겨났다. 학교 ‘일진’들이 힘없는 학생들에게 강제로 스마트폰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에 가입시킨 뒤 무선공유 기능을 통해 공짜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신종 착취 방식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교실이 정글로 변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모습도 그런 점이 있다는 얘기다. 자본만능주의와 성적·학벌 지상주의가 판치는 한 교실은 밀림이 될 수밖에 없다. 국회 안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폭력사회가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부처 아우를 상설기구 필요

분명한 것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 기업, 정부 등 사회 전체가 나서지 않으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권 추락과 과열 입시경쟁 외에 핵가족화와 저출산, 맞벌이 부부 증가, 과도한 업무에 따른 ‘가정 붕괴’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종합처방을 내놓으려면 교과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청와대나 총리실 차원에서 상설기구를 만들고 컨트롤 타워를 맡아 부처 간 협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컨트롤 타워의 중요성은 300만여마리의 소를 희생시킨 1년 전 구제역 사태에서 이미 확인됐다.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동시에 열리는 올해엔 웬만한 이슈들은 시간이 지나면 묻혀버리기 쉽다. 비상대책위원회가 필요한 곳은 요즘 ‘돈봉투 사건’으로 시끄러운 한나라당뿐이 아니다.

이건호 지식사회부 차장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