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다양하고 잠재력 있는 기업을 발굴해 상장시킬 목적으로 금융 당국이 도입한 제도가 대부분 흔들리고 있다.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은 본래 목적인 합병까지 가는 사례가 드물다. 외국 기업은 현실적으로 국내에 발을 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성장성 큰 벤처기업 유치를 위해 도입된 특례상장은 바이오 분야 외에는 성과를 내지 못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위기의 스팩’…합병 줄줄이 무산

상장 진입로 넓혔지만 '무용지물'
하나그린스팩은 28일 오전 코팅장비업체 피엔티와의 합병을 위한 임시주주총회를 열었지만 시작 10분여 만에 폐회를 선언했다. 참석 주주와 의결권을 위임한 주주의 총 주식 수가 146만498주로 합병안 통과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하나그린스팩의 주식 수는 총 523만3000주이며, 합병안 통과를 위해서는 전체의 3분의 1인 172만여주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했다.

최대주주 유진자산운용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하나그린스팩 지분 16.4%를 보유한 유진자산운용은 지난 21일 합병안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하나그린스팩 관계자는 “막판까지 주주들을 상대로 설득에 나섰으나 유진자산운용의 반대 이후 일부 기관들까지 등을 돌렸다”고 전했다.

유진자산운용은 스팩 측에서 비상장 기업의 가치를 과도하게 높게 책정해 합병 이후 주가가 부진할 것으로 예상했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는 게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익을 낼 것이란 판단에서 합병에 반대했다.

앞서 키움스팩1호와 에스비아이앤솔로몬스팩은 23일 나란히 합병 취소 내용을 공시했다. 합병 대상이었던 영풍제약과 웨일즈제약이 제약업 부진 등으로 인해 거래소의 상장 승인을 받지 못한 탓이다. IBK스팩1호 하이제1호스팩 부국퓨쳐스타즈스팩 대신증권그로쓰스팩도 거래소의 미승인이나 주주들의 반대 등으로 합병이 무산됐다.

스팩 펀드를 운용 중인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스팩 주주와 비상장 기업의 주주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에 성장성이 있는 기업이라면 굳이 스팩을 통해 상장할 이유가 없다”며 “스팩은 사실상 실패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외국 기업 상장도 ‘유명무실’

우리나라 증시를 세계화하겠다며 거래소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외국 기업 유치는 사실상 중단 상태다. 무엇보다 투자자 모집이 어렵다. 중국고섬 사태 이후 “외국 기업은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기관이 많다. 장부에 적혀 있는 숫자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상장 작업을 진행했던 외국 기업이 스스로 발길을 돌리는 사례도 있다. 일본 기업 파워테크놀로지는 이달 초 공모가 산정을 위해 기관을 상대로 수요예측까지 받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상장을 포기했다. 국내 증권사 중 가장 공격적으로 중국 기업을 발굴하고 있는 신한금융투자는 최근 중국건재설비과기유한공사의 상장 계획을 접었다. 외국 기업 인식이 안 좋은 상황 속에서 중국 부동산 업황까지 악화됐기 때문이다.

2005년 도입된 성장형 벤처기업 상장 특례제도도 겉돌고 있다. 제도 도입 7년 동안 특례상장한 벤처기업은 9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바이오 기업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거래소가 올 3월부터 신성장동력에 해당하는 기업에 한해 요건을 완화해줬지만 이후 이 기준이 적용된 기업은 한 건도 없었다. 올 들어 클라우드 컴퓨팅 업체 이노그리드가 유일하게 도전했지만 최근 상장 예비심사에서 떨어졌다. 이노그리드 기업공개(IPO) 주관사인 유진투자증권 관계자는 “녹색인증 특례상장 첫 사례여서 거래소가 보수적으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