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유연성 있는 대북정책 방침을 밝힌 후 북한은 23일 첫 반응으로 조문 문제를 들고 나왔다. 우리 측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문단을 모두 받겠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일행을 제외한 조문단 파견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남북이 충돌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우리 정부에 ‘야만’이라는 격한 용어를 동원해 맹비난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조문 파동’과 같은 남남갈등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의도는?

북한은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에서 남측의 모든 조문단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남조선 당국 자신도 응당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조문을 남북 관계 전반의 문제로까지 확대해 나가겠다고 했다. 북한은 “조의 방문 문제는 남북관계 운명과 관련되는 신중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남측이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 남북관계가 풀릴 수도 있고 완전히 끝장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요약하면 김 위원장 사망에 조문을 원하는 남측 인사들의 방북을 모두 허용하고, 우리 정부가 이에 반대하면 남북관계는 더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한 셈이다.

북한의 이런 태도에 대해 우리 정부는 두 가지 목적이 담겨 있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우선 기선잡기용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한 당국자는 “이 대통령이 유연성 있는 대북 관계를 밝혔음에도 향후 남북 대화 과정에서 호락호락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당이나 일부 민간단체가 김 위원장 조문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1994년과 같은 보수-진보 간 갈등 유발을 꾀하려는 목적도 있다는 분석이다. 이미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는 자체적으로 조문단을 구성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조문은 기본적으로 남북관계에 윤활유 역할을 하지만 북한이 이 문제로 남남갈등을 노리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통일부는 추가로 조문 방북을 승인하거나 정부 차원의 조의 표명을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이미 이 대통령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방북 추진에 ‘곤란하다’고 밝힌 상황에서 정부가 입장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한 당국자는 “유연한 대북 정책으로 간다고 해서 민간 조문까지 허용하게 되면 조문 논란으로 우리 사회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도 “민간 조문단 파견 문제로 논란을 이어가는 것은 향후의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1994년 조문파동은

17년 전 김 주석 사망 당시의 조문파동은 국회에서 비롯됐다. 당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은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상임위 회의에서 “같은 민족으로서 우리 쪽에서 조문단을 파견하거나 그것이 안된다고 하면 조문의사를 표시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지 않느냐”며 남측의 조문단 평양 파견을 제안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 주석 간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김 주석이 사망한 만큼 조문단을 보내는 것이 민족 이익에 맞다는 의미였다.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회(한총련)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의 재야단체는 조문단 파견 의사를 밝혔고, 정부는 조문단 방북 불허방침으로 맞섰다.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김 주석에 대한 조문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북한은 우리 정부의 조문단 방북 불허를 물고 늘어졌다. 노동신문은 논평에서 “남조선 당국이 조문단 파견을 가로막고 조전·조의는 고사하고 애도의 뜻조차 표시하지 않은 것은 상식 이하의 불손하고 무례한 행위”라며 “남조선 통치집단의 대범죄를 단단히 결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북한 각급 사회단체의 비난성명이 이어졌고, 조문 문제는 한동안 우리 사회를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