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文士, 조선서 '성리학 스승' 만나다
예나 지금이나 외국 사람과 만나 학문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진지한 학문적 대화는 가벼운 날씨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법. 오늘만 지나가면 곧 잊혀질 무상한 날씨 이야기와 달리 신실하게 교감을 나눈 학문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에 남아 ‘영원한 현재’를 살아간다. 역사와 문화가 다른 외국 사람과 주고받는 학문 이야기의 여운은 더 짙고 깊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외국 사람과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공간은 주로 우리나라 바깥이었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청나라 세력이 장기간 조선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서울에서는 조선과 청 사이의 문화·학술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다.

조선 선비 박승동이 1889년 서울에서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의 막료인 선비 손경종(孫慶鍾)을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은 이런 교류의 한 장면이었다. 둘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박승동의 《미강집(渼江集)》중 ‘영해필(瀛海筆)’을 보자.

손경종:제가 제(齊)나라에서 태어나 제(齊)와 노(魯) 사이에서 노닐며 조금 학문하는 방도를 압니다. 지금 멀리 다른 나라에 와서 외롭고 쓸쓸해 다시 공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걱정되지 않으나 이것이 걱정입니다.

박승동:우리나라 이문순(李文純·이황)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道)는 일상에서 유행하니 어디에 가든 없는 곳이 없다. 따라서 이치가 없는 곳이 한 자리도 없으니 어느 곳인들 공부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경각에도 혹여 쉬는 곳이 없다. 따라서 이치가 없는 때가 한순간도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경중과 박승동의 문답은 이렇게 이어진다.

손:거경(居敬)과 궁리(窮理), 두 가지 설은 정주씨(程朱氏)가 창립한 큰 가르침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거경과 궁리 중에서 잠시라도 어느 것을 먼저해야 하겠습니까?

박:퇴옹(退翁·이황)이 율옹(栗翁·이이)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궁리와 거경은 비록 서로 수미(首尾)가 되지만 사실은 두 가지 공부입니다. 절대로 둘로 나누었다고 근심하지 말고 반드시 상호간에 진보하는 것으로 법칙을 삼으세요. 기다리지 말고 지금 곧장 공부하세요. 지체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처한 곳에 따라 즉시 힘을 쏟으세요.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보되 먼저 자기 생각으로 고집해 정하지는 마세요. 점점 쌓여 순결히 익어가리니 세월을 책하지 말고 평생의 사업으로 조치하세요. 이치(理)가 융회함에 이르고 경건(敬)이 전일함에 이르는 것은 모두 조예가 깊어진 뒤 스스로 터득할 뿐입니다.”

손:아아! 책을 끼고 학업을 행한 지 20년 동안 사무에 통달하지 못했고, 해외에서 병기를 잡으며 다시 책 속의 성현과 접하지 못했습니다. 군문 침상에서 엄한 스승의 훈계를 추념하니 거의 하늘가 꿈 속의 일 같습니다. 존양(存養)의 공부와 격치(格致)의 정성에 관해 질의할 곳이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해외에서 이렇게 훌륭한 스승을 얻었으니 부유하는 인생이지만 낙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청의 문사들과 만나 교류했던 사람들은 대개 서울에 사는 경화사족과 그들의 문객이었다. 청군과 군함을 타고 조선에 들어왔던 김윤식(金允植), 청군을 공식적으로 영접했고 많은 문사들과 교유했던 김창희(金昌熙), 시에 약한 김창희를 위해 많은 시를 대작하며 그를 지원했던 조면호(趙冕鎬), 김윤식의 주선으로 청의 문사 장건과 만나고 훗날 장건의 고향에서 문필 생활을 한 김택영(金澤榮) 등이 우선 눈에 띄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교류에 동참했을 것이다.

당시는 과거 시험이 자주 시행돼 지방 사족의 서울 체류가 빈번했기 때문에 이들이 청나라 문사들과 만날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1889년 박승동(朴昇東·1847~1922)과 손경종의 만남은 조선의 지방 선비와 청나라 문사의 교류라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되는 사건이다. 박승동은 경상도 대구에서 서찬규(徐贊奎·1825~1905)를 사사한 선비였는데, 서찬규가 헌종·철종대 조선 낙학(洛學)의 종장인 홍직필(洪直弼·1776~1852)의 유력한 문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서울 사정에 밝았고 서울에 자주 체류했다.지방의 평범한 선비인 그가 공맹(孔孟)의 고향에서 온 중국인과 만나 학술적인 필담을 나눈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필담의 내용도 손경종에게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황과 이이 등의 가르침을 전해주면서 손경종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라, 중국의 학문을 배우는 게 아니라 조선의 학문을 가르치는 자리의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조선과 중국의 교류에서 항상 조선이 중국에 가서 무엇을 배워 오는 상황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상황도 있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끝에 가서 조선과 중국의 풍속이 과연 문명의 본질이라 할 예의를 실현하고 있느냐는 문제로 신경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우호적인 필담이었다. 이들의 필담은 과연 이 시기 조·청 학술교류의 전체적인 흐름 위에서는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었을까.

노관범 < 가톨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