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노기술 세계 4위인데…
세계 최대 규모의 학술논문 데이터베이스인 스코퍼스(SCOPUS)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과학기술 경쟁력은 세계 12위 수준에 올라섰다. 2000년 15위에서 3단계 상승한 것으로 지난 10년간 지속적인 연구 · 개발(R&D) 투자 확대에 따른 것이다.

이런 성과 중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나노기술 분야 과학기술 경쟁력은 더 눈길을 끈다.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나노기술 투자 규모가 미국이나 일본 유럽연합(EU)의 절반에도 미치고 못한다. 후발 경쟁국인 러시아 중국 등에 비해서도 훨씬 작은 규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4위를 달성한 것은 아마 나노기술 분야가 처음일 것이다. 신생 학문이라 할 수 있는 나노기술만큼은 선진국에 뒤지지 않겠다는 열정이 발휘된 때문일 것이다.

세계 각국이 나노기술에 인력과 시간,돈을 쏟아붓고 있는 이유는 뭘까. 기존보다 50배나 강하면서도 가벼운 강철,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는 컴퓨터,분자 수준에서의 생명현상 제어 · 조작 등 첨단소재 · 부품 산업부터 바이오에 이르기까지 나노기술은 그동안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기술 발전의 한계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수없이 입증했다.

'나노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에릭 드렉슬러가 1986년 저서 '창조의 엔진'에서 나노의 미래를 얘기했을 때만 해도 나노기술은 허무맹랑한 공상과학 정도로 취급됐다. 그러나 불과 25년이 지난 지금 드렉슬러는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나노기술을 제품에 어떻게 적용할지 컨설팅해주는 전문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는 올여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제조업 지향적 성격이 강해 나노기술을 융합한 미래 제조기술 발전에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10년이 나노원천기술 확보를 놓고 벌인 국가 간 경쟁이었다면 앞으로의 10년은 확보된 나노원천기술을 어떻게 산업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쟁이다.

이런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지식경제부가 교육과학기술부와 협력해 원천기술부터 상용화까지 전 과정의 나노기술 R&D를 지원하는 '나노융합 2020' 프로젝트를 마련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그러나 내년 예산으로 불과 몇 십억원이 배정됐다는 소식은 우리 나노기술산업의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지난 10년간 2조원 넘게 투자해 거둔 나노원천기술의 R&D 성과물은 산업계로 이전돼 궁극적으로 산업화 · 실용화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연말이 다가오면 도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보도블록 교체 공사에도 매년 200억원 이상이 쓰인다. 하물며 미래 먹거리이자 산업 경쟁력의 핵심인 나노기술에 보도블록 교체공사 비용만도 못한 인색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봐야 한다.

한민구 < 서울대 전기공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