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은 성장의 파생물…기업들의 '야성적 충동' 살려줘야"
미국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미국 경제의 더블딥(짧은 경기회복 뒤 재침체)을 막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선 단기적으로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기적 경기부양책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위기를 잉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장인 글렌 허버드 교수가 대표적이다.

허버드 교수는 1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부양책에 대한 거침없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가계 소비와 정부 지출에 의존해온 미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선 고통스러운 조정기간이 필요하다"며 "기업의 투자와 수출을 장려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금 인상 논란에 대해서도 허버드 교수는 "불확실성을 줄여야 기업들이 마음놓고 투자할 수 있다"며 "세금 인상은 투자 위축으로 이어져 세수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중산층과 서민들이 저금리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정부가 재융자(refinancing)를 유도하는 정책을 쓰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를 통해 증세나 지출 확대 없이 700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미국 전역으로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가 확산되고 있는데.

"월스트리트 자체에 대한 분노도 있겠지만 더 깊고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 회복 속도에 대한 좌절감이다. 그 중에도 고용시장이 회복되지 않는 것에 크게 좌절하고 있는 것 같다. 성장과 고용 확대를 위해 정책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현 정부가 실패하고 있다는 데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동의한다. "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실업률을 줄이는 데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고용은 성장의 파생물이다. 잠재성장률에 비해 더 빨리 성장하면 실업률은 자연스럽게 낮아진다. 이를 위해 주택시장을 살리고 기업들이 투자하고 수출을 늘리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현 정부의 정책 목표에는 그런 내용은 없는 것 같다. "

▼기업들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살려주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뜻인가.

"정확한 표현이다. 사실 버블이 붕괴되고 경기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가계는 차입 축소(deleverage)가 필요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차입을 한 적조차 없다. 차입 축소는 기업들의 이슈가 아니다. 그들은 현금을 쌓아놓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이 다시 투자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투자를 저해하는 정책만 내놓고 반기업정서를 부추기는 정치적 수사로 투자 의욕을 꺾고 있다. "

▼기업들이 투자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확실성을 줄여야 한다. 지금 기업들은 앞으로 세금이 얼마나 오를지,규제가 얼마나 강화될지 알 수 없다. 너무 많은 불확실성이 있어 경영과 관련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더 나은 내일이 있다'는 확신이 서야 투자에 나설 것이다. "

▼만약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장이라면 어떤 정책을 쓰도록 조언하겠나.

"첫째로 모기지(주택담보대출)의 대규모 재융자를 유도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현재 미국의 모기지 금리는 60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저금리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현재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서 대출받은 사람의 75%가 연 5%가 넘는 30년 만기 고정금리로 대출을 받았다. 지금 시장금리는 4.25% 수준이다. 개인들은 집값 하락,수수료 부담 등으로 재융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계의 이자 부담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고 연체와 주택 가압류가 늘어나면서 경기침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정부가 나서 이들이 4% 이하 금리로 재융자받을 수 있도록 할 경우 3000만명의 대출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줄어드는 이자비용만 700억달러 정도 된다. 세금을 걷을 필요도 없고 의회 승인도 필요 없다. 대통령이 당장 오늘 오후에라도 실시할 수 있는 정책이다. "

▼다른 부양책은 뭐가 있나.

"기업 투자에 대한 과감한 인센티브다. 재원은 장기적인 세제 및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통해 충당해야 한다. 이는 재정적자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인 어스킨 볼스와 앨런 심슨(전 공화당 상원의원)이 지난해 이미 제안한 내용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직접 이들을 임명해놓고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들의 제안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나마 대통령이 최근에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의회에 보낸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2009년 1월29일에 취임했다. 도대체 왜 지금에서야 비준안을 의회에 보낸 건지 알 수 없다. 이 정부는 경제에 관심이 있는 모습이 아니다. "

▼부자 증세를 포함해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미국 일자리 법안(American Jobs Act)'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미국의 인기 퀴즈쇼인 '제퍼디(Jeopardy)'에는 답을 먼저 알려주고 질문이 무엇인지 맞히는 게임이 있다.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제안이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경기를 오히려 후퇴시키는(contractionary) 방안이다. 일시적인 경기부양을 위해 영구적인 증세를 한다는 점에서다. 만약 '부자들에게 돈을 좀 더 걷어야겠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내놓은 제안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이건 부양책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적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그래도 실업률이 9.1%에 달하는 상황에서 정부의 부양책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대통령은 단기 부양책이 총수요를 증대시키고 경제성장의 시동을 걸 것으로 기대한다. 경기후퇴 국면에서 이 같은 정책은 시기만 잘 맞추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다르다. 미국은 금융위기 이전부터 가계 소비와 정부 지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기업 투자와 수출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다. 미국의 금융시스템과 경제는 이 같은 구조적 변화에 맞춰 조정기간을 거쳐야 한다.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은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한국에서도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와 관련해 논란이 많다.

"법인세는 투자와 고용을 늘리는 데 해가 된다. 나는 미국의 법인세율을 현행 35%에서 25%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세금개혁을 통해 그보다 더 인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법인세율을 낮춘다고 세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기업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이익이 날 만한 투자처를 고른다. 만약 본국에서 세금이 줄어 수익률이 높아지면 투자를 할 것이고,이를 통해 세원이 늘어나 세수도 증가하게 된다. 이미 큰 정부를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도 법인세는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소비세에 의존하고 있다. 소비세는 세수를 늘리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다른 나라도 참고할 만하다. "

▼도드-프랭크법 등 금융산업 규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월스트리트의 인재 수요는 줄었을지 몰라도 전 세계적으로 금융 인재 수요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규제 강화로 현존하는 회사들은 생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도 새로운 기회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별로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금융규제에 찬성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금융위기는 (고위험 · 고수익 투자를 하는) 헤지펀드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다. 주택 문제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도드-프랭크법안은 이런 핵심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고 겹겹이 규제를 만들고 있다. 물론 투명성을 높이는 등 일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결국 최종 소비자들의 금융비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 많은 규제가 금융시장을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허버드 교수는, 보수진영 대표 경제학자…세계 금융 움직이는 30人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 미국 보수진영의 대표 경제학자다.

부시 행정부의 대표적 정책인 감세정책도 그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물러났을 때 벤 버냉키 현 의장과 함께 유력한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재정 및 통화정책과 관련해 미국 의원들이 가장 많이 자문하는 교수 중 한 사람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05년 허버드 교수를 워런 버핏,그린스펀 등과 함께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30인'으로 선정했다. 2008년 대선 때는 공화당 후보 중 한 명인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의 경제자문으로 활동했다. 센트럴플로리다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컬럼비아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4년부터는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