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앞에서 뒷걸음질치기도 하고 좌우로 움직여보기도 한다. 방탄유리 재료인 0.2㎜ 두께의 투명 폴리카보네이트 다섯 장에 유화로 소나무를 그린 뒤 겹겹이 쌓아 LED(발광다이오드)조명을 비추면 입체감이 한층 살아난다. 구름 속에 뿌리를 박고 떠다니는 듯한 소나무 이미지는 한 폭의 수묵화처럼 색다른 신비감을 준다. 관람객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림도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다.

1997년 광주비엔날레 최연소 작가로 주목받은 손봉채 씨(44)가 내달 30일까지 이어지는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의 개인전에 내보인 입체회화 작품 '이주민들'이다. '빛을 품은 입체회화' 장르를 개척한 손씨는 "단지 비슷한 풍경을 겹치는 것이 아니라 한 장면이나 풍경을 공간 분할하는 것"이라며 "물리적으로는 다섯 개의 면으로 분할되지만 개념적으로는 시공간을 분할하는 것으로 하나하나의 면이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성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학 강사 시절 시험감독을 하던 중 OHP(광학투영기) 필름을 활용해 커닝하던 학생에게서 입체회화 작업의 힌트를 얻었다. 투명한 레이어가 여러 개 겹치면 대상이 입체로 보이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교실 뒤쪽에서 계속 반짝거림이 이어지더군요. 다가가면 아무것도 없고 학생에겐 커닝페이퍼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바스락 거리고 반짝이는 게 의심스러워 다가가다 투명필름을 발견했죠.시험지에 갔다 대니 깨알 같은 글자가 입체적으로 보이더군요. 아,바로 이거다 했죠."

잘 변색되는 아크릴과 쉽게 깨지는 유리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방탄유리 재질인 폴리카보네이트를 사용했다. 또 판재 뒤로 LED조명을 비춰 일반 원근법의 한계를 극복했다.

"제 작업은 최첨단 3D(입체)기술을 이용하는 착시현상이 아닙니다. 아날로그 방식의 전통회화 기법에 폴리카보네이트,LED와 같은 첨단 재료를 결합한 것이죠.3차원 입체와 2차원 회화의 결합이라고 보면 됩니다. "

이 같은 참신성 덕분에 그의 입체회화 기법은 2009년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입체회화 작업은 기억과 일상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상처를 끄집어내거나 예전에 본 풍경들을 되살려내기도 한다.

"우연히 산에서 뿌리째 뽑혀 트럭에 실려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뿌리내린 곳에 살지 못하고 떠도는 조경수에서 부유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봤거든요. "

낯선 땅에서 살아남으려는 조경수가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느껴졌다는 그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치는 풍경들에는 다양한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며 "차곡차곡 중첩된 5개의 화면에 지나온 시공간의 역사를 담아내려 했다"고 덧붙였다.

공수부대 낙하산이 떨어지는 뉴욕 맨해튼,뉴욕 한복판에 서 있는 북한 여경 등에는 초현실적인 내러티브도 엿보인다. 물리적으로는 다섯 개의 화면에 불과하지만 시공간을 분할하는 심리적인 풍경을 통해 감각의 궤적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산(離散)의 꿈'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입체회화 3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손씨는 내년 1~2월 독일 마이클슐츠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도 준비 중이다. (02)736-437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