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私法원칙 부정한 '대규모 소매업법'
지난달 29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현행 '대규모 소매업에 있어서의 특정불공정거래행위의 유형 및 기준 지정고시'를 올 8월 국회에서 법률로 승격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대규모 유통업자들이 납품업자 등의 열등한 처지를 이용해 은밀하게 불공정 행위를 일삼는 것을 좀더 쉽게 차단해 중소 납품업자 보호를 강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갑과 을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을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겠다는 공정위의 취지는 나름대로 이해할 만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번 공정위의 가칭 '대규모 소매업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대규모 소매업법)' 제정안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공정위의 행정편의적 입법정책이라는 의구심이 짙기 때문이다.

우선 이 대규모 소매업법이 제정되면 앞으로 공정위는 연간 매출액 1000억원이 넘는 모든 대규모 소매업자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갖게 된다. 즉 지금까지와는 달리 공정위가 이들 사업자에 대해 법 위반을 이유로 해당 행위의 중지,시정권고,시정조치,과징금 및 과태료 부과,고발 등을 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번 법 제정안을 공정위가 직접 마련하지 않고 의원입법이라는 우회적인 방법을 이용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번 대규모 소매업법의 제정 목적이 불순하다는 지적에도 공정위가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됐다.

그 밖에도 이 제정법안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은 여전히 많다. 우선 아무리 강자와 약자 간의 거래관계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사적 거래관계까지 깊숙이 관여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 구체적인 예로 법안에서는 납품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서면계약을 체결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공정위가 과징금 등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점을 들 수 있다.

원래 사법상 계약이란 낙성계약(諾成契約:당사자 간 합의만으로 성립하는 계약)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서면계약은 단지 증거 수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납품업자가 원해서 구두계약을 체결하는 경우에도 대규모소매업자가 과징금 등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매번 소량을 납품하면서 상호계산방식으로 장부상 거래를 해 오던 많은 영세 납품업자들이 불가피하게 매번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법안에 따르면 대규모 소매업자가 납품업자의 물품을 수령 거부하거나 지연하는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은 물론이고 과징금 등의 행정제재를 받고 형사고발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물론 납품업자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예외를 두었지만,귀책사유의 존재 여부는 법원의 판단이 끝나봐야 아는 만큼 별 실효성이 없는 규정이다.

그 밖에도 법안에 있는 계약 변경금지,판매대금 기한 내 지급의무,납품대금 감액 금지 규정 등은 사법상 기본 원칙인 계약자유의 원칙을 전면 부정하는 사회주의적 법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유통시장은 이미 글로벌화됐으며,앞으로도 국내 사업자들과 외국계 대형 유통사업자들 간의 무한경쟁은 불가피한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 대규모 소매사업자의 거래활동을 통제하려는 대규모 소매업 법안은 분명 시대에 역행하는 기형적 · 역차별적 법률이 될 수 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이번 대규모 소매업법의 제정 취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적 법인 공법과 사적 자치법인 사법과의 구분까지 철폐하면서 중소 납품업자를 법률로 보호해야 할 만큼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공정위가 좀더 관심을 갖고 유통시장을 규율한다면 현재 갖고 있는 '고시'로도 충분할 수 있다. 부디 공정위가 행정편의주의에 몰입돼 가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전삼현 < 숭실대 법학 교수 / 기업소송연구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