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제로' 안전 일터 만들자] (7) 화학물질 3만7000종, 유해 여부 모른 채 사용
서울행정법원이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직원 2명에 대해 산업 재해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직원 황모씨와 이모씨에게 나타난 백혈병의 발병 경로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더라도,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각종 유해 화학물질과 미약한 전리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발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작업장의 화학물질 사용이 백혈병 발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판단이다.

2005년 1월 LCD · DVD 부품제조업체인 화성의 D기업에서 외국인 근로자 8명이 세척제로 쓰이는 유기용제 노말헥산에 중독돼 다발성 신경장애(하반신 마비증)라는 질병에 걸린 사고가 발생했다. 노말헥산은 오랫동안 접촉하면 신경장애를 일으키는 유독 화학물질이다.

하지만 이들은 노말헥산이 유해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방독 마스크나 불침투성 장갑 등 개인 보호장비 없이 작업을 하다가 중대재해를 입었다. 작업장 내에는 환기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평일에는 하루 평균 12시간,주말에는 8~10시간씩 작업이 이뤄졌다. 노말헥산의 노출 농도도 제대로 측정되지 않았고 특수 건강진단도 실시되지 않았다.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된 것이다.

유해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한 작업장 중독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업무 중 유해 화학물질에 의한 중독 및 질식사고는 모두 462건으로 전년도(423건)에 비해 6.5% 늘어났다. 이 중 사망자는 37명으로 전년 대비 18.2% 증가했다.

[산재 '제로' 안전 일터 만들자] (7) 화학물질 3만7000종, 유해 여부 모른 채 사용
지금 전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10만종에 달한다. 국내 일터에서 사용됐거나 사용되고 있는 화학물질은 4만3000종에 이른다. 그 중 6000종에 대해서만 유해성 평가가 이뤄질 뿐 나머지 85%(3만7000종)에 대해선 정확한 유해성 평가 없이 사용된다.

문제는 많은 근로자들이 자각증상도 없이 유해 화학물질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화학물질이 유해한지,무해한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양전선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화학물질안전보건센터 팀장은 "사업주나 근로자들은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에 어떤 유해성이 있는지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대부분의 화학물질이 어느 정도 위험한지 모른 채 사용되고 있어 소리 없이 재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화학물질마다 유해성 정도를 분석해 놓은 물질안전보건자료(MSGS)를 갖출 필요가 있다"며 "그래야 사업주나 근로자들도 어떤 독성이 있는지 판단해 사용할 때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화학물질 누출을 막기 위해 뚜껑을 닫고 환기시설을 잘 가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날씨가 더워 귀찮다고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으면 불의의 사고를 당할수 있다. 최근 고양시 이마트 기계실에서 냉방기 점검작업을 하다 인부 4명이 숨진 것도 방독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작업을 하다가 당한 사고다.

전문가들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씩의 특수 건강검진도 권유한다. 유해물질을 다루는 직업은 언제 어떤 질병에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업주들도 근로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안전설비를 설치하고 직업병 유소견자로 판정났을 땐 부서 이동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