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7일 미국 경기 회복이 예상보다 더디고 불규칙하다고 진단하면서도 경기 부양을 위한 추가 양적완화 조치를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 버냉키 의장의 발언이 전해지자 오름세를 보이던 다우지수는 장 막판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버냉키 의장은 이날 애틀랜타에서 열린 전미은행가협회(ABA) 연설에서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통화정책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 뒤 "미국 경제가 건실하게 성장하기 위해선 재정적자 감축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버냉키 의장이 3차 양적완화 조치 가능성을 배제하는 발언을 하며 시장의 기대를 가라앉힌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미국 경기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일본 대지진과 원자재 가격 상승에서 비롯된 일시적 현상이란 인식이 깔려 있다.

골드만삭스는 일본 지진 발생에 따른 공급망 훼손으로 미국 경제성장률이 0.6%포인트 떨어졌을 것으로 분석했다. UBS는 일본 지진 영향으로 미국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둔화한 것으로 추정했다. FRB는 여전히 미국이 경기 상승 중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소프트패치에 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 버냉키 의장이 이날 하반기부터 미국 경제가 다시 회복세를 탈 것이라고 전망한 것도 이런 경기 진단에 따른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이날 "미국 경제 회복 속도가 원하는 만큼의 일자리를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느리지만 경기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FRB 내부에서는 미국 경제가 겪는 어려움이 경기순환적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데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윌리엄 더들리 뉴욕연방은행 총재는 이날 뉴욕 맨해튼에서 가진 연설에서 "거시경제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잡는 역할을 주로 하는 통화정책만으로 구조적인 경제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구조적인 문제란 차입에 의존한 정부 지출과 과도한 정부 부채가 경제 회생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화당국 내부에서는 양적완화 조치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각종 경제 지표가 꺾였지만 3차 양적완화 조치를 시행하기 위한 명분을 찾기도 여의치 않다. 10개월 전 국채 매입을 통한 2차 양적완화 조치를 내놓을 때는 더블딥(경기 회복 후 재하락)과 디플레이션(전반적인 가격 하락) 우려가 컸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디플레이션보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졌다.

4월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같은 달에 비해 3.2% 상승했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추가로 돈을 풀었다가 자칫 인플레이션 심리를 자극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 공격적인 통화정책을 주장해온 찰스 에번스 시카고연방은행 총재조차 이날 월스트리트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추가 양적완화 조치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월가 금융사들은 경기 둔화 우려가 확산된 상황에서 FRB가 경기회복세가 뚜렷해질 때까지 현재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경제 상황을 지켜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이날 "미국 경제가 여전히 잠재성장률을 밑돌고 있으며 따라서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계속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기 회복이 가시화할 때까지 제로 수준의 연방기금 금리를 유지하고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에 재투자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