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work life balance)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이래,최근 서구에선 일명 '라이프스타일 이주(life style migration)'가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여기서 라이프스타일 이주란 문자 그대로 기존의 경쟁 지향적이고 성공 강박적인 일 중독의 삶 대신,명실공히 일과 삶의 균형을 조화롭게 실현하고자 새로운 거주 지역으로 이주해 이전의 삶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생활양식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이들 라이프스타일 이주는 미국이 한창 풍요로움을 구가하던 당시 대유행을 이뤘던 교외이주(sub-urbanization)와는 명백히 다른 현상이다. 교외이주는 도심의 혼잡함을 떠나 전원풍의 교외 지역에 스위트 홈을 마련하고,'아빠=생계 책임자' '엄마=전업주부' 모델을 중산층 핵가족의 이상으로 설정하면서 나타난 사회 현상이다.

한데 교외이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표면(表面)의 평화로운 이미지와는 달리 이면(裏面)엔 다양한 역설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무장한 가장은 하루 왕복 3~4시간을 도로 위에서 허비해야 했고,가정을 '무자비한 세상 속의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무장한 전업주부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병'(베티 프리단이 명명한)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이후 교외이주는 재도시화의 반격에 자리를 내주고 서서히 사라져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다시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의 라이프스타일 이주는 교외이주에 담겨 있던 비현실적 환상을 거두어내고 모순적 허위의식도 극복했다. 대신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가치 기준을 설정하고,한번뿐인 인생의 우선 순위를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동시에,부부와 부모자녀 간의 친밀한 유대와 자유로운 소통을 기반으로 가족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고 한다.

현재 라이프스타일 이주를 결정하는 이들은 대략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한 그룹은 고령사회를 지나가면서 은퇴 이후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이들이요,다른 한 그룹은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초(超)경쟁 영역에 종사해온 비교적 젊은 세대들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고액 연봉과 사회적 파워,그리고 보장된 성공의 달콤한 유혹을 기꺼이 포기하고,솔직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가족관계에서 오는 포만감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오는 충족감을 최대한 즐긴다고 한다. 전자의 경우 또한 은퇴로 인한 역할 상실과 정서적 공허감에 시달리는 대신,가족 및 지역사회 역할 속으로 성공적으로 복귀함으로써 자신의 생애주기 상 가장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압축 성장과정에서 뒤돌아볼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네로선,돈과 물질적 가치를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는 우리네로선,OECD 국가 중 국민의 행복지수와 생활만족도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네로선,이제 한번쯤은 멈추어 서서 깊이 숨을 고른 다음 고도 성장과정에서 잠시 잊었던 소중한 가치들을 찾아 나설 때가 온 것 같다.

부부 나이를 합해 백 살이 되거들랑 귀농하리라 약속했다던 '허브마을' 주인공 부부 이야길 듣자니 그 용기와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고,부창부수하며 함께 지나가는 노후가 아름답게 다가온다.

굳이 현실 속의 귀농이 아니더라도,경쟁이 습관화된 일 중심 세계로부터 헤어나와 가장 소중한 이들과 함께 진정 의미있는 삶에 도전해보는 라이프스타일 이주를 감행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갈 때,우리네 삶이 더욱 성숙해지고 관계 또한 풍요로워질 것이다.

함인희 <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