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인호 씨(66 · 사진)가 5년 만에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 펴냄)를 내놨다. 1985년 《잃어버린 왕국》을 시작으로 주로 역사와 종교를 다룬 장편 · 대하소설에 몰두했던 작가는 문단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던 현대소설로 복귀했다.

최근 암 치료를 받으며 지방에서 묵상과 기도로 지내 온 작가는 "원래 내 본령은 현대소설이지만 세월이 이끄는 순리대로 살다 보니 역사소설이나 종교소설들을 30년 이상 주로 집필해왔다"며 "이번 소설은 장거리나 마라톤 주행에 익숙해졌던 체질을 개선한 첫 작품"이라고 말했다. 체질 개선의 계기는 3년간의 암투병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암이 내게 선물한 단거리 주법의 처녀작"이자 "연재용이나 청탁을 받아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쓴 첫 번째 전작소설"이라고 털어놓았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여의도의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결혼 15년차 남성 K의 얘기다. 그는 금요일 저녁 정신과 의사인 친구 H와 술을 마신 후 오후 9시30분부터 11시까지의 기억을 잃는다.

또 토요일 아침부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다고 느낀다. 자신이 즐겨 쓰던 스킨 로션은 바뀌어 있고 아내와 장모조차 낯설다. 마주치는 행인들은 1인 다역의 배우처럼 같은 얼굴들이다. 그는 그들이 진짜가 아니라 '조작된 가짜' 혹은 '역할극을 하는 배우'라고 믿게 되고 잃어버린 기억과 휴대폰을 추적하며 점차 혼돈을 느낀다.

토요일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단 사흘간을 그린 이 소설은 사실주의와 환상주의를 넘나들면서도 미스터리 요소를 갖고 있어 빠르게 읽힌다.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배우들이 연기하는 연극 무대처럼 변한다면 온전한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모범적인 가장이나 기업의 조직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어느 날 허물어지면서 진짜 '자아'와 '관계'를 고민하게 되는 작품이다. 곳곳에 깔린 성적(性的) 코드들은 진짜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인간 본능과 연결돼 있다.

컴퓨터를 쓰지 않는 작가는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중지 손톱이 빠져 고무 골무를 끼고 매일 원고지 20~30장씩 썼다"며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열정은 불탔고 창작욕은 허기가 진 느낌이어서 집필하는 두 달간의 나날이 '고통의 축제'였다"고 밝혔다.

1963년 고교 2학년 때 단편 '벽구멍으로'로 문단에 데뷔한 최씨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소설집 《타인의 방》과 《위대한 유산》,장편 《별들의 고향》《도시의 사냥꾼》《상도》《해신》 등 수많은 작품을 썼다. 현대문학상 · 이상문학상 · 가톨릭문학상 · 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