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오프라 윈프리
미시시피 변방 빈민가에서 태어나 9살 때 성폭행 당한 흑인 소녀의 앞날은 암담했다. 가출소녀 쉼터를 전전하던 중 마약에도 손을 댔다. 14살 땐 임신한 채 이혼한 아버지를 찾아갔다 저주에 가까운 말만 들었다. "못된 행동이나 임신 같은 걸로 가족에 치욕을 안기느니 차라리 죽어서 강물에 떠내려가는 게 낫겠다. " 아이를 낳았으나 2주 만에 죽었다. 기구한 세월을 견뎌내기 어려워 자살도 생각했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얘기다.

윈프리는 죽음 대신 진학을 택했고,많은 책을 읽으며 좌절을 극복해갔다. 틈틈이 지역 방송에서도 일했다. 인생역전이 시작된 건 1980년대 중반 30분짜리 TV프로 'AM시카고' 진행자가 되면서다. 경쟁 프로는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던 필 도너휴의 토크쇼였다. 'AM시카고'는 한 달 만에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로 올라섰고,1년도 안돼 이름까지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었다. 이후 25년 동안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미국 시청자만 수천만명에 세계 140여개국에서 방송되는 신화를 일궈냈다. 에미상도 47번이나 받았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포브스),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텔레그래프)으로도 꼽힌다.

성공 요인은 많다.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솔직함과 가슴을 열게 하는 따뜻함,재치와 파격까지 갖췄다. 1988년 방송에선 다이어트 선언 4개월 만에 30㎏이나 감량한 뒤 꼭 맞는 청바지를 입고 손수레에 30㎏의 지방덩어리를 싣고 등장했다. 얼마 후 "4개월간 단식했으나 방송 직후 축하 음식을 마구 먹었더니 이틀 만에 청바지가 맞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녀와 마주앉으면 대부분 허울을 벗어 던지고 진솔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대통령부터 마약중독자까지 3만여명을 출연시켰다.

일부에서 너무 감정적이란 비판도 받는다. 인생 성공이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오프라이즘(Oprahism)'이 사회 모순을 은폐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불량소녀'에서 토크쇼의 여왕으로 떠오른 윈프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다.

'오프라 윈프리 쇼'는 25일 막을 내렸지만 끝은 아니다. 새로운 토크쇼 '오프라의 넥스트 챕터'를 준비중이다. 혹 좌절했거나 시련을 겪는 이들은 그녀의 다음 말을 되새겨 볼 일이다. "당신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당신 자신입니다. " "도전하지 않으려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