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부터 기생집 아르바이트까지..전형성 벗어나

"위기에 처하면 '뿅'하고 나타나고, 문제가 생기면 '척'하고 해결해주기 때문 아닐까요. 돈도 많이 있을 것 같고, 차도 많을 것 같고, 근사한 식당에 예약하고 갈 것 같고…"

2004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재벌 2세 한기주를 연기했던 박신양은 한기주의 인기 비결에 대해 당시 이렇게 분석했다.

사실 이는 비단 한기주만의 모습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숱하게 만나 온 재벌 2세 남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등장하는 재벌 2세 남자 주인공은 사랑 빼고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데, 그 유일하게 빈 구석을 착하고 씩씩하고 명랑 쾌활한 여주인공이 채워주고는 했다.

그런데 최근 드라마 속 재벌 2세의 모습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백마탄 왕자'의 전형성을 탈피한 캐릭터들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말고도 부족한 게 많다.

무조건 친절하거나, 무조건 '쿨'하지도 않다.

심지어 돈이 없기도 하다.

덕분에 왕자님들이 좀 더 '인간적'이 됐다.

백마는 타고 왔는데 말에서 내려 땅을 밟으려고 하는 이들 왕자님 덕분에 드라마 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폐소공포증에 청각장애..억만금으로도 해결못하는 병 있다 = 요즘 극중 재벌 2세들에는 불치병이 있다.

억만금으로도 해결못하는 병을 남몰래 앓고 있는 것. 물론 기업의 주가 문제, 후계자 문제 등에 있어 병은 치명적인 장애물이라 절대 '쉬쉬'해야한다.

다만 여주인공만은 꼭 이를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다.

지난겨울 안방극장을 훈훈하게 만들었던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은 남모르는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20대 초반 화재가 난 건물 속 엘리베이터에 갇혀있다가 구사일생 살아난 직후부터 생긴 병으로, 그로 인해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차도 오픈카만 탄다.

MBC 주말극 '내 마음이 들리니?'의 차동주(김재원)는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송승환)가 재벌인 외할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현장을 몰래 지켜보다가 사다리에서 추락하면서 청력을 상실한다.

그의 엄마(이혜영)는 남편의 눈을 피해 동주를 데리고 수년간 해외에 머물다 귀국한다.

그 사이 동주는 듣지 못해도 상대의 입술을 보며 대화를 할 수 있는 법을 익힌다.

돌아온 동주는 장애를 숨긴 채 외할아버지의 회사를 삼키려는 의붓아버지에 맞선다.

지난 3일 막을 내린 SBS '마이더스'의 유명준(노민우)은 췌장암에 걸려 마지막회에서 사망했다.

수조원 대를 굴리는 재벌가의 셋째 아들이지만 췌장암 앞에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기생집 서빙부터 출판사 편집국장까지..재벌 티 안 낸다 = 재벌 2세라는 배경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사랑을 위해 잠시 벗어두기도 한다.

SBS 주말극 '신기생뎐'의 아다모(성훈)는 사랑하는 단사랑(임수향)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사랑이 일하는 기생집에 웨이터로 취직한다.

그는 유니폼에 나비 넥타이를 맨 채 손님들이 질펀하게 먹고 마시는 방에 음식을 나르고, 틈틈이 마당 청소도 한다.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하지만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은 뒷전이다.

MBC 주말극 '반짝반짝 빛나는'의 송승준(김석훈)은 출판사 편집장이다.

그의 홀어머니(김지영)는 허름한 순댓국집을 운영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순댓국집은 부업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수천억 원을 굴리는 사채업자다.

송승준은 퇴근 후 종종 식당 카운터에 앉아 손님들의 음식값을 계산하기도 해 부잣집 아들로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절대 돈 많은 집 아들이라는 티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부자들만 산다는 평창동에서도 가장 비싼 제일 높은 지대에 있는 으리으리한 집에 산다.

돈이 필요한 국회의원, 기업가들은 앞다퉈 그의 어머니를 찾아와 머리를 조아린다.

지난 5일 끝난 KBS '가시나무새'의 이영조(주상욱)는 이복형과의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나면서 재래시장 허름한 원단가게에 취직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한 계단 한 계단씩 밟아올라갔다.

그가 원단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누구도 그가 재벌 2세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 종영을 앞둔 KBS 일일극 '웃어라 동해야'의 주인공 동해도 알고보니 대형 호텔 후계자이지만 경영보다는 요리사로서의 삶을 더 좋아하고, SBS 일일극 '호박꽃 순정'의 민수(진태현)도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기 전 사회를 경험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시장에서 채소배달일을 했다.

◇까칠하다..그러나 미세한 차이가 있다 = 과거 신데렐라 스토리의 재벌 2세들은 대체로 부드러운 '훈남(훈훈함을 주는 남자)'이었다.

모든 것을 갖췄는데 성격마저 좋아 여성 시청자들을 사르르 녹였다.

그런데 요즘 재벌 2세들은 거의 다 까칠하다.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 캐릭터가 부상하면서 재벌 2세들도 '한성격'하게 됐다.

대표적으로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은 까칠하면서도 귀엽게 잘난척하는 재벌 2세의 모습을 통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절대 친절하지 않고 절대 겸손하지도 않다.

그러나 김주원의 타고난 '귀티'에 여성들은 마음을 내줬고, 그 까칠함도 '멋'으로 받아들였다.

9일 시작한 SBS 새 월화극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현기준(강지환)은 그런 김주원의 모습에 코믹함을 좀 더 가미한 캐릭터다.

재벌 2세 호텔 사장으로 1등 신랑감이지만 까칠한 성격 탓에 '본의 아니게' 코믹한 상황이 연출된다.

또 11일 시작하는 KBS 새 수목극 '로맨스타운'의 강건우(정겨운)는 극초반 몸무게가 150㎏에 육박하는 거구로 나온다.

거구일 때는 착하고 순진무구한 캐릭터였지만 아버지에게 강제로 떼밀려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차도남'으로 변한다.

'로맨스타운'에는 '까도남'도 있다.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그림 덕에 부자가 된 김영희(김민준)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예술적 안목이 높은 귀족풍의 남자다.

배우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까칠한 재벌 2세'를 보여주겠다고 자신한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강지환은 "'시크릿 가든'의 그분(현빈)은 군대에 갔기 때문에 현재 활동 중인 배우로서 다른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며 "방송을 보시면 차이점을 아실 것"이라고 자신했다.

'로맨스타운'의 정겨운도 "격이 다른 재벌 캐릭터를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재벌 2세의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