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평창동 언덕에 있는 서양화가 도윤희 씨(50)의 작업실.여느 아틀리에와 달리 입구가 철문이다. 초인종도 없고 인터폰도 없다. 안에서 문을 열어주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구조.잠깐 기다리는 동안 꽃샘추위 끝으로 눈발이 흩날렸다.

콘크리트 건물 속의 작업실은 넓고도 높았다. 천장이 보통 건물의 두 배나 됐다. 낯가림이 심한 그가 '혼자 틀어박혀' 작품과 씨름하는 공간."좀체 사람을 잘 만나지 않아요. 인터뷰도 쑥스럽고…." 검은 뿔테안경을 낀 그의 표정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겹쳐진다.

바닥에는 색색의 물감통과 켜켜이 세워놓은 캔버스,붓,연필들이 널려 있다. 특이한 것은 평면 도르래로 움직이는 발판과 레일.화판을 이젤에 세우고 하는 작업보다 바닥에 눕혀놓고 그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작업을 많이 하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장치다. "제 그림이 비교적 큰 편인데 이쪽 끝에서 저쪽까지 손이 닿지 않아요. 그래서 레일 위를 왔다갔다하며 작업하죠.가끔은 생각을 가다듬느라고 일 없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

그러고 보니 오는 23일부터 한 달간 갤러리 현대에서 여는 전시회의 출품작들도 거대하다. '읽을 수 없는 문장'이라는 설치작품은 가로 7m가 넘는 대작이다. 네 개의 캔버스를 합친 '살아 있는 얼음'도 가로 4m24㎝에 세로 2m82㎝다. 나머지 그림들 역시 1m60㎝ 이상이다.

그 큰 화면 속에 그는 시간의 단층을 압축해서 그려낸다. '읽을 수 없는 문장'은 몇 년 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여행할 때 배를 타고 좁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본 풍경을 형상화한 것."그날따라 아주 약한 바람이 불고 있었죠.강물이 바람 부는 모양대로 수면에 새겨지는 장면이었는데 바람이 물에 조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햇빛이 강물의 움직임을 따라 반짝이고….그렇게 계속 지워지고 또 생겨나는 물을 보면서 마치 바람과 햇빛이 인간은 해석할 수 없는 어떤 문장을 타이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디지털 코드나 암호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몇 년 갖고 있다가 이번에 작업하게 됐습니다. "

그는 컴퓨터에서 사진 이미지의 픽셀을 다 깨 버리고 강물의 이미지와 색도 모두 지워 버린 후 거기서 자신이 보았던 느낌만 걸러내는 과정을 반복해 9장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를 한지에 출력한 다음 전시장 공중에 매달았다. 여기에 전시실의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면서 40여초 간격으로 점멸하도록 연출했다. 그는 "어두워질 땐 야광을 발산하도록 했다"며 "그 강물을 봤을 때 읽었던 이미지와 느낌을 최대한 살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표현대로 '현재성을 영원의 이면으로 포착'하는 작업이다.

"시간의 템포를 좀 늦추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가 있잖아요. 현미경으로 세포 분열 과정을 볼 수 있듯이 어떤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원래 있던 것과 다른 걸 발견할 수 있어요. 그런 시간에 대한 작업.꼭 세포의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제 안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작업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

그는 '시간이 무작위로 이동하는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기법을 활용한다. 첫 단계는 물감을 순간적으로 희석시키는 화공약품에 섞어 캔버스 위로 떨어뜨리는 드리핑 작업이다. 드리핑하는 순간의 현상을 그대로 남기는 것.그 위에 연필 드로잉과 바니시(표면처리에 사용되는 투명한 도료) 작업을 반복한다. 그렇게 170회 정도 계속해야 한 작품이 완성된다.

"우리는 늘 현재의 시점에 서 있지만 방금 전은 이미 과거죠.그런 현재의 순간이 쌓이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해요. 과거나 미래의 것은 기억이나 유추에 의존할 뿐이지요. "

그는 이 같은 현재의 나열을 표현하기 위해 레이어(표면 사이를 덮고 있는 막)를 쌓고 또 쌓는다. 바니시는 투명한 물질이어서 그 이전의 층이 희미하게 보인다.

"계속 쌓아도 속이 보이는데 마치 창문을 열고 또 한 겹 들어가서 열어보고 또 들어가서 보는 것과 같죠.그래서 제 작업은 몽환이나 상상이 아니라 '인식'에 관한 거예요. 어느 순간에 한번 지나가고 끝나거나 진정성이 없어지면 상상일 수 있지만 그것이 반복적으로 계속되면 인식이 되지요. "

그가 규칙적으로 작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뭔가가 생기면 그걸 놓칠까봐 밤을 새우기도 하고 불규칙적으로 했지만,지금은 어떤 영감이 떠올라도 한참을 숙성시킬 수 있다는 것."1~2년이나 길게는 5~6년 동안 제 속에 저장됐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시점에 나오는 게 많아요. 이번 전시도 5~6년 전에 준비해둔 작업들이죠.언제 나올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화면으로 옮겨져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규칙적인 작업 방식으로 변했죠.하루 중 일정 시간 작업에 몰두하고 그 외에는 책을 보거나 글을 씁니다. 그게 제 본연의 상태로 돌아오는 시간이어서 좋아요. "

그의 일상이 규칙적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과는 정반대다. 동 트기 전쯤 자고 점심 때 일어나 그림에 몰입하다 저녁 늦게 요기한 뒤 또 그림에 빠졌다가 새벽 4~5시까지 사색하는 것이다. "가끔은 작업실을 이리저리 거니는 것을 즐기는데 완전한 정체보다 약간 규칙적인 떨림이 있을 때 머리가 잘 돌아가요. 러닝머신 위를 걸으면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요. "

그의 작품은 다소 어렵고 철학적이다. '시간'이나 '인식' 같은 관념어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감성이 그랬을까.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을 보면서 얘는 옛날에 무엇이었을까,얘가 지금 이 상태를 좋아할까,나중에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까,이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돌이켜보면 전생이나 윤회사상 같은 거죠.그때 뭘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닌데….우리가 선험적으로 알고 느끼는 게 있잖아요. 나의 본향은 어디일까,나는 어디서 왔을까 하는….한마디로 생각이 많은 소녀였죠."

그는 처음부터 화가를 꿈 꾼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다 뒤를 돌아보니 화가가 돼 있었다고 말한다. 하긴 꼬맹이 시절에도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림뿐이었다니 예술적 끼는 타고나는가 보다.

그는 '항아리와 꽃의 화가'로 불린 도상봉 선생(1902~1977년)의 손녀이기도 하다. 성신여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시카고의 일리노이주립대에서 2년간 공부했다. 몇 년 전에는 세계적인 컬렉터 에른스트 바이엘러가 만든 스위스 바젤 바이엘러갤러리에서 아시아 작가로는 처음 개인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07년 3월17일~5월5일 '히든 뷰티'를 주제로 펼친 그 전시회에 회화 25점과 드로잉 12점을 발표한 직후 세계 각국의 미술인들이 집결하는 바젤아트페어에서도 초청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성곡미술관,호암미술관뿐만 아니라 미국 필립 모리스와 월드뱅크,시카고 아트프로그램시립컬렉션 등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이유다.

그가 화가 지망생들에게 주는 조언은 뜻밖에도 '물감'이 아니라 '책'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림만 그리는 것은 자칫 노동에 그칠 수 있는데,그게 소진으로 끝나면 안되죠.무엇인가 더 넓히기 위한 것들,다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좋은 게 책을 읽는 겁니다. 특히 인문학을 기초로 한 책들.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너무나 중요한 요소지요. "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