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게 원자폭탄이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까지 매일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첨단 과학기술이 일본을 무릎꿇리고 세계 각국 젊은이들의 생명을 구했다. 일본도 나름대로 승산이 없지 않았는데 졸지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2차대전을 계기로 두 나라는 과학기술에 '통큰' 투자를 한다. 한쪽에선 승전 경험이,다른 쪽에선 뼈저린 패전 경험이 국가과학기술분야에 투자를 쏟아붓도록 했다. 2차대전의 경험이 국가 과학기술 정책에 녹아 있는 셈이다.

얼마 전 김도연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울산대 총장)이 들려준 이야기다. 김 회장은 "과학은 돈을 써서 지식을 만들고,공학은 지식을 통해 돈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과학기술 투자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등 국가들은 과학기술을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이 분야에 공을 들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새해 시정연설에서 "미국은 현재 '스푸트니크 모멘트'에 와 있다"고 말했다. 스푸트니크는 1957년 미국보다 앞서 옛 소련이 우주로 쏘아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미국과 옛 소련 간 첨단 과학기술 경쟁을 촉발시킨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스푸트니크 모멘트'를 언급한 것은 주요 2개국(G2)의 다른 축인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길도 결국 과학기술에서 열린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 국가부주석은 춘제(春節 · 설)를 앞두고 우주항공전문가 쑨자둥 원사(院士 · 최고 과학자에게 헌사하는 칭호) 등 국가 원로 과학자 3명의 자택을 방문,지금의 중국을 있게 한 과학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업적을 치하했다.

강대국 지도자들이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모멘텀에 불을 지피고 있는 반면 한국의 지도자들은 낯 뜨거운 '밥그릇 싸움'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올해 대한민국 과학기술계는 큰 변곡점에 있다. 먼 훗날 역사가들이 그렇게 평가할 일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출범하고,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지가 선정된다.

비상설 대통령자문기구에 불과했던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상설 행정기구로 격상돼 국가과학기술정책을 기획 · 조정하고 흩어진 국가 연구 · 개발(R&D) 예산의 배분 · 조정 권한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오는 4월 출범 일정을 잡아놓고 있는 국과위는 아직까지 위원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되레 부처 간 '밥그릇 싸움'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틀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최근 "국과위가 과학연구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에 충실해야지,자원 배분과 통제를 위한 조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곳간 운영권을 국과위에 줘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당초 정부의 구상과 다른 주장이다.

과학벨트 유치를 위해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국회의원들이 앞장서 벌이는 날선 공방은 더욱 가관이다. 이들은 자기 지역에 과학벨트가 들어서지 않으면 잘못된 결정이 될 것이라며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주판알을 튕기기는 여야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우주선을 쏘아올리지 못하고,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게 눈앞의 이익만 좇는 지도자들 탓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정말 그렇다면 훗날 역사가들이 '과학벨트 쇼크'라고 부르지 않을까. 백년대계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선 곤란하다.

남궁 덕 과학벤처중기부장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