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 신작 사극 '평양성' 덫에 걸렸다. 8년 전에 연출한 전작 '황산벌'을 능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첫 번째 덫이다. 두 번째 덫은 "흥행에 실패하면 상업영화 감독을 그만둘 것"이라고 스스로 뱉은 말이다. 1230만명을 동원한 '왕의 남자' 이후 그가 연출한 5편 영화는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는 데 실패했다. 27일 개봉한 '평양성'마저 250만명을 돌파하지 못하면 "저예산 독립영화를 연출하게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 감독은 "이 모든 게 '왕의 남자' 초대박의 후유증"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해 80%쯤 촬영됐을 때 가진 현장 공개에서 '이 영화마저 실패하면 그만두겠다'는 말을 처음 했어요. 일종의 자신감이었고 호기였어요. 기획부터 제작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너무 만족스러웠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활자로 소개되니까 '은퇴' 선언이 된 거예요. 제 스스로 족쇄를 채운 셈이죠.창작자의 속은 너무 뜨거워 실수도 잦아요. 쿨한 놈이 무슨 창작을 하겠습니까. "

이제 그는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런데 일부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감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일각에서는 '평양성'을 '황산벌'에 직대입해보면 웃음 강도에서 뒤진다고 평가합니다. '황산벌'과는 다른 웃음을 유도하니까요. 웃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아 풍자와 해학 차원으로 승화시켰어요. 제 영화를 '감상'하러 온다면 후한 점수를 줄 것이고,'감시'하러 온다면 박한 점수를 줄 것입니다. "

'황산벌'은 신라 김유신 장군과 백제 계백 장군의 싸움을 영 · 호남 사투리를 앞세운 코미디로 형상화했다. '평양성'은 백제를 꺾은 신라가 당나라군과 연합해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 드라마.신라와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백제군 '거시기'가 신라군에 재입대했다가 고구려군에 포로가 되고,우여곡절 끝에 고구려 여인과 결혼해 삼수갑산에서 살게 되는 에피소드가 곁들여진다.

"영 · 호남 사투리에다 평안도와 함경도 사투리까지 영역을 확대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사투리는 맛이 덜해요.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우리에게 어색해진 탓이죠.그래서 현실 풍자에다 역점을 뒀어요. 협력하는 척하다 야욕을 드러내는 당나라는 오늘날 미국이나 중국이 될 수 있겠지요. 김유신은 거의 노망기도 있는 할배로 묘사돼 남북 관계에 너그러운 시선을 던집니다. 권력자의 너그러움으로 계층 간,지역 간,세대 간 갈등을 넘어서야 한다는 메시지가 웃음과 해학으로 전해져요. "

그가 만든 역대 사극은 2승2패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최근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님은 먼곳에'는 실패했다. "사람들은 제게 '제2 왕의 남자'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감독 입장에서는 그대로 반복하면 매너리즘입니다.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해 늘 새 방식으로 도전할 겁니다. "

사극을 많이 연출하는 이유도 들려줬다. "서양 사극을 많이 보며 자랐습니다. 서양 사극은 '벤허'와 '십계'등을 거쳐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로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극은 팩트와 픽션을 합친 팩션에 머물러 있어요. 중견 감독이 역사의 심층부까지 들어가야 한국판 '반지의 제왕'도 나올 겁니다. 일종의 사명감으로 고집스럽게 그 계단을 쌓고 있습니다. "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