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망해도 서울서 망해야"…채무자들, 심사 불리한 지방법원 외면
# 경기 의정부에 사는 A씨는 서울회생법원에 개인파산 신청을 했다가 면책 불허가 결정을 받았다. 빠른 처리를 노리고 관할 법원을 서울로 바꾸기 위해 강북구로 위장 전입한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A씨에게 허위 주소지를 제공한 법무사 사무실은 법원에서 경고 처분을 받았다.

서울로 ‘원정 파산·회생’에 나서는 지방 채무자가 급증하고 있다. 지방보다 서울 법원의 사건 처리 속도가 빠른 데다 심사 기준과 변제금 산정 방식 역시 서울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절박한 이들의 파산 회생 절차에도 지방·서울 간 차별이 있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사건 처리 빠른 서울로 위장전입

28일 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15개 법원 중 서울의 개인파산 사건 처리 속도는 2개월로 지방보다 최대 6배 빨랐고, 개인회생 사건은 4.7개월로 지방보다 최대 2배 이상 신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파산은 채무 변제가 불가능할 경우 남은 재산을 채권자에게 배분하고 면책받는 제도다. 법원에서 도산 절차가 늦게 진행될수록 채무 상환 부담이 가중되는 까닭에 신속한 사건 처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정 채무를 감면하는 회생도 속도가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지방 채무자들은 사건 처리가 빠른 서울로 주소지를 옮기고 있다. 도산 사건의 관할 법원은 주소지, 직장 위치 등에 따라 정해진다. 서울회생법원 관계자는 “재판 과정에서 사건을 접수하기 한두 달 전에 서울로 이사 온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며 “심지어 여러 채무자가 한 사무장의 주소지를 적어낸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법원에 낸 거소지 등이 허위이면 신청이 기각될 수 있다. 이에 휴대폰을 추가로 개통해 서울의 임시 주소지에 놓고 휴대폰 기지국 추적을 피하는 등 다양한 ‘꼼수’가 성행한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상담 과정에서 원활한 절차를 돕고자 관할 법원을 바꾸는 방법을 안내하기도 한다”며 “채무자 사이에선 ‘망해도 서울에서 망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처리 속도가 크게 차이 난다”고 귀띔했다.
[단독] "망해도 서울서 망해야"…채무자들, 심사 불리한 지방법원 외면

서울은 주식 투자 손실까지 탕감

서울 법원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지역보다 채무자에게 유리한 실무 준칙이다. 실무 준칙이란 회생·파산 등 도산 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정해놓은 업무 지침이다. 도산전문법원이 있는 서울·부산·수원은 배우자 재산을 개인회생 채무자 재산에 반영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지방 법원에서는 배우자 재산의 절반을 포함한 변제 계획을 요구한다.

또 서울·부산·수원은 주식이나 암호화폐 투자 손실은 개인회생 변제금 산정 때 반영하지 않는다. 암호화폐 투자로 발생한 손실금도 탕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최근 암호화폐 투자 실패로 빚더미에 앉은 20대 채무자가 서울로 몰리는 이유다. 지난해 하반기 20대의 개인회생 신청 비율은 17%로 2년 전 동기보다 6%포인트 높아졌다. 이은성 미래로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는 “지방 법원일수록 채무자의 변제 계획을 더 엄격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며 “전국 법원이 실무 준칙 등을 통일하면 전반적인 사건 처리 효율도 개선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회생 최다인데 지방은 ‘완행 처리’

2017년 첫 도산전문법원이 된 서울회생법원은 회생·파산 업무에만 집중해 사건 처리 속도가 빠르지만, 지방 법원은 파산부에서 도산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민사와 형사 업무를 맡으면서 도산 사건을 다루는 일도 많아 처리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최근 경기 침체로 도산 사건이 급증하면서 법원별 속도 격차는 더 벌어지는 추세다. 지난해 개인회생 접수 건수는 12만1017건으로 전년 대비 34.5% 늘어나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법인파산과 법인회생 신청도 각각 1657건, 1602건으로 전년보다 65%, 53% 증가했다.

올해 들어선 증가세가 더 가팔라지고 있다. 작년 3월 개원한 부산회생법원에 지난 2월까지 접수된 개인회생 사건은 전년 동기 대비 94%, 개인파산은 28.4% 급증했다. 부산회생법원 출범과 함께 채무자 소재지를 부산뿐 아니라 울산, 경남으로까지 확대한 영향이다. 급기야 부산회생법원의 한 실무 담당자는 이달 초 법원 내부망(코트넷)에 “제대로 증원이 안 되면 휴직하겠다는 직원이 넘쳐난다. 차라리 법원 설립을 취소해달라”며 인력 부족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신용회복위 채무조정 신청 18.5만명…18년 만에 최대

전문가들은 연체 장기화 방지와 경제적 재기를 위해 개인 재무 상황에 적합한 채무조정 방안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28일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신복위 채무조정 신청자는 18만5000명으로 2006년 이후 최다를 기록했다.

신복위 채무조정 프로그램은 연체 기간별로 신속채무조정(1개월 미만), 사전채무조정(1~3개월 미만), 개인워크아웃(3개월 이상)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상환 기간 연장부터 이자율 조정, 원금 감면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4월 2일까지였던 신속·사전채무조정 특례 운영 기한이 연말로 연장되면서 채무조정 신청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하반기부터는 통신비도 금융채무와 함께 채무조정 대상에 포함된다. 오는 10월부터는 3000만원 미만 채무자는 금융회사에 사적 채무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

금융회사 외 개인 채무가 많고 신복위 지원만으로 채무를 갚기 어려운 경우 법원에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을 신청할 수 있다. 개인회생은 소득 증빙이 가능하고 무담보채권 10억원 이하, 담보부채권 15억원 이하인 채무자(개인사업자 포함)만 신청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이 보유한 재산으로 모든 채무를 변제할 수 없을 때 파산을 신청할 수 있다. 파산 절차를 거쳐 채무를 면책받으면 경제적으로 재기할 기회가 되지만 부정적 인식 때문에 파산을 꺼리는 일이 많다.

민경진/허란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