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 입법 현안과 관련해 정부가 여당을 ‘패싱’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부처 공무원들이 국민의힘 정책위원회나 상임위 간사들과 논의하지 않고 직접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협상을 벌이면서다. 지난달 총선 참패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당정이 균열하는 것은 물론 여야 협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단적인 예다. 지난 23일 이재명 대표 등 민주당 관계자들은 “정부가 소득대체율 45%를 협상안으로 제시했다”며 “정부안을 받아들일 테니 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을 타결 짓자”고 주장했다. 이에 여당은 “정부안은 43%, 여당 간사안은 44%”라며 “이 대표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논란은 보건복지부 실무자가 여당을 거치지 않고 민주당과 직접 협상하면서 불거진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 관계자는 “복지부 관계자들이 연금특별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성주 민주당 의원을 만나 ‘소득대체율 45%까지도 괜찮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말했다. 여당 간사인 유경준 의원 등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연금개혁안을 모수개혁이라도 21대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복지부 일부 공무원이 “구조개혁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여당을 패싱한 것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방폐장) 특별법’도 마찬가지다.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서 마지막까지 법안에 반대하던 김성환 민주당 의원이 지난주 “정부 여당안을 받아들이겠다”며 입장을 바꾸며 법안 통과에 파란불이 켜지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여당 간사인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합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가 야당과 직접 협상을 벌인 것이다. 산업부는 쟁점이었던 방폐장 저장 용량과 관련해 야당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해 여당의 한 의원실 보좌관은 “물론 정부가 야당 의원들에게 직접 현안과 법안을 설명하는 경우는 있지만 논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해당 상임위 여당 간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최근과 같은 사태는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정책위 관계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 대표와 영수회담을 한 이후 심해지는 분위기”라고 했다.

정부가 ‘국가인증통합마크(KC) 미인증 제품 국외 직구’ 금지 조치를 내놨다가 여론 악화로 철회하자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0일 “영향력이 큰 주요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당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해줄 것을 촉구한다”며 공개 비판한 것도 불편한 감정이 반영된 것이란 평가다.

29일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나타난 특수 현상이라는 설명도 있다. 법안이 폐기될 위기에서 평상시처럼 절차를 다 지켜가며 야당과 협의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정부에선 나온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이런 현상이 22대 국회에서 더 심해질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정권 후반부로 갈수록 거대 야당이 법안 처리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노경목/박주연/설지연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