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마젤란은 中지도 보면서 세계를 돌았을 뿐"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 책 《고지도의 비밀》을 쓴 중국의 변호사이자 지도역사학 연구가 류강은 마젤란의 세계일주가 최초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거침없이 내뱉는다. 문제 제기 수준이 가히 충격적이다. 정화(鄭和)의 대함대 원정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됐다는 영국 역사학자 개빈 멘지즈(《1421》의 저자)보다 윗길이다. 세계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 책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당혹스럽지만 정신 차리고 페이지를 넘겨 보자.

저자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수백 개의 중국 고(古)지도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 · 1418년)를 베낀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 1763년).여기엔 지구상의 모든 대륙과 대양이 그려져 있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뚜렷하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중국인들이 1418년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갔고 세계일주도 마쳤다고 주장한다.

지도에 기록된 내용도 흥미롭다. 이 지도엔 지역마다 붉은색 주석이 달려 있는데 가령 '조선 사람들은 불교를 믿고 일부는 도교를 숭상한다'는 식이다. 미국 서부 지역에 대해선 '토착민들의 피부가 검붉고 인육을 먹는 관습이 있다'고 적혀 있다. 이런 기록들이 저자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지도에 현미경을 들이대자 놀라운 사실이 더 드러난다. 중국의 천하제번식공도가 제작된 것은 15세기 초.그 이후로 유럽지도의 방향 배치가 바뀌고 제작 수준이 갑자기 향상됐다. 마우로의 지도(1459년),피리 레이스의 지도(1513년) 등이 그것인데 저자는 유럽 항해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데는 중국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말한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무작정 항해한 게 아니라 아메리카와 남극대륙 등의 지형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는 화약,나침반,종이에 이어 원양항해,천문관측,경도측정 등 중국의 기술이 유럽으로 전해졌음을 암시한다.

1116년 중국 요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세경의 채색성상도와 장광정의 세계지도(1093년)를 본뜬 천하전도(1722년)도 주목할 만하다. 28개 별자리와 황도십이궁이 마주보고 있는데 중국과 유럽의 천문학 교류를 짐작케 한다. 5대륙 표기와 지도투영법 역시 중국에선 적어도 13세기 이전부터 있어 왔음을 시사한다.

저자가 방대한 자료 수집과 치밀한 논증을 제시한 이유는 자명하다. 《고대 해양왕의 지도》를 쓴 찰스 햅굿처럼 중국의 고지도를 통해 유럽 중심의 역사관을 비틀어 보려는 것이다. 논지가 확대되면 유럽 입장에선 겁나는 일이지만 "학계의 고증 절차가 아직 남았다"고 저자는 한 걸음 물러선다. 지도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총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은 덤이다.

책을 감수한 정인철 부산대 교수는 "세계사를 물구나무 세우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에는 비약이 상당이 많다"면서도 "향후 지도학계에 연구과제를 안겨준 매우 의미 있는 저서"라고 평가했다.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