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유신비판' 사건 파기자판…합헌 전제 옛 판례 폐기
오종상씨 36년만에 무죄확정…형사보상 길열려

1974년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해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16일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대통령긴급조치ㆍ반공법 위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오종상(69)씨의 재심 사건을 파기자판,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유신 시절인 1974~75년 1호부터 9호까지 발동되면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수단이 됐던 대통령 긴급조치에 대해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한 것은 처음이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는 국회의 의결을 거친 '법률'이 아니어서 위헌 여부에 대한 심사권이 헌법재판소가 아닌 대법원에 속한다"며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목적상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상으로도 위헌"이라고 밝혔다.

이어 "긴급조치 1호가 위헌인 이상 유언비어 날조ㆍ유포로 인한 오씨의 긴급조치(제1호 제3,5항) 위반 혐의는 무죄를 선고해야 함에도 면소를 선고한 원심에는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반공법 위반 혐의는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는 관련 법령의 폐지를 이유로 면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두 혐의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로써 오씨는 36년만에 무죄를 확정받게 됐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로 긴급조치 1호가 합헌이라는 전제하에 내려졌던 기존의 대법원 판례들도 모두 폐기했다.

오씨는 1974년 5월 버스 등에서 여고생에게 "정부가 분식을 장려하는데 고관과 부유층은 국수 약간에 계란과 육류가 태반인 분식을 하니 국민이 정부 시책에 어떻게 순응하겠나" 등의 정부 비판 발언을 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오씨 사건에 대해 `피해자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줘야 한다'며 재심권고 결정을 내렸다.

원심 재판부는 "오씨의 자백은 폭행, 협박, 고문 등으로 임의성이 없어 유죄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며 반공법 위반 혐의는 무죄를 선고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는 "법령이 폐지됐다"며 면소로 판결했다.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명예회복과 함께 형사보상이 가능하지만, 면소는 유ㆍ무죄에 대한 판단 자체를 하지 않은 것으로 무죄 판결이 내려질 만한 현저한 사유가 있었는지 재차 심리를 거쳐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긴급조치 1호 =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 제53조는 천재ㆍ지변이나 재정ㆍ경제상 위기,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4~75년 긴급조치 1~9호를 발동했다.

1974년 1월 선포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 비방과 유언비어를 날조ㆍ유포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2호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하게 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파기자판(破棄自判) = 상고심 재판부가 원심 판결을 파기하면서 1,2심 법원이 조사한 증거와 소송기록으로 판결하기 충분하다고 판단해 사건을 원심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abullapi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