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인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 파병용사들의 후손을 위한 장학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였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자유를 지켜내고 이만큼 살게 됐으니 그들과 그 가족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 이 사업의 취지다. 올해 아흔의 연세에도 우리의 정성이 고맙다며 내미는 손길에 힘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북한군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왔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제대로 반격도 못했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고장난 자주포나 열악한 대피호 모습은 과연 우리가 연간 300조원의 예산을 사용하는 나라인지 의심케할 정도였다. 불안과 두려움에 피난 나온 주민들은 찜질방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아웅산 사태에서부터 천안함 사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북의 도발에도 우리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무던히 참아왔다. 반격할 역량이 충분하지만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인내한다고 믿었으나 이번 대응을 보니 그런 믿음에 자신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한국전쟁을 다룬 백 장군의 자서전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를 꺼내 보았다. '전쟁의 참혹성을 기억하는 자는 그 전쟁을 피할 수 있다. 늘 그에 대비하기 때문이다. 적에게 맞설 능력을 보유한 자는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다. 적이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함부로 잊는다는 것은 이 땅 위에 60년 전의 참혹한 희생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 ' 온몸으로 전쟁의 참화에 맞선 노 장군의 일갈이 가슴을 쳤다.

어찌보면 연평도 사건은 그간 망각해온 중요한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줬다. 평화로워 보이는 남북관계가 실상은 전쟁을 잠시 멈춘 휴전상태이며,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환상이 상대의 불장난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30여년 전 대학생 때 데모에 동참했다가 아버지께 훈계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젊은 혈기에 데모하는 것은 이해하나 국가 혼란기에 북한이 오판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참상을 부를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자 해병대에 입대해 통영전투에서 인민군을 백병전으로 물리치고 북진했다. 그 과정에서 퇴각하는 인민군이 포로로 잡은 군인과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공군에 밀려 함흥에서 미군과 함께 후퇴한 뒤 휴전 때 제대하셨다. 아버지처럼 6 · 25 참전 용사로 현재 생존해 계신 분은 20여만 명이지만 해마다 그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그분들에게는 참전 명예수당 명목으로 월 9만원이 지급된다고 한다.

그분들은 연평도 사건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갖고 있을까? 중풍으로 언어장애가 있는 아버지께 여쭤볼 수도 없지만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실 것 같다. 명예수당을 반납할테니 그 돈 모아서 고장난 장비 교체하고 군인들 부식비에 보태라고.

"자유가 어떻게 내게 주어졌는지 한동안 잊고 살았다. 백 장군을 뵌 뒤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가 모두 앞선 분들의 소중한 피와 땀,희생이 모여 만들어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는 한 대학생의 소감이 절절히 와 닿는다.
이재술 <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대표 jaelee@deloitt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