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에 재직할 당시 국제 외환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미스터 엔'이란 애칭으로 불렸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는 신간 《달러 표류》를 통해 글로벌 금융위기를 야기한 핵심 인물로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인 1995~1999년 미 재무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루빈을 지목했다. 그의 '강한 달러' 정책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강한 달러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루빈은 달러 약세를 유도해 경상수지 적자를 축소하는 것을 단념하고 금융시장 활성화를 통해 미국경제를 재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장기간에 걸쳐 금융완화정책을 펼치며 그를 지원했다. 그 결과 신용부도스와프(CDS) 부채담보부증권(CDO) 등 파생상품을 중심으로 금융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세계의 자금이 몰려들면서 금융주도의 경기회복이 이뤄졌다. 하지만 리먼 파산 사태를 계기로 그것은 엄청난 거품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달러 약세를 유도해야 할 상황에서 반대 방향을 택한 루빈의 정책이 미국경제를 더 어려운 처지에 빠뜨린 셈이다.

사카키바라의 지적대로라면 미국경제는 강한 달러 정책을 취해온 시기만큼 부담과 피해가 누적됐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최근 환율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미국 정부와 의회가 강력하게 중국 위안화에 대해 절상 압력을 넣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사실상의 제로금리를 이어가는 것,통화공급을 늘리고 있는 것 등도 단시일 내에 달러 가치를 끌어내리려는 노력과 관련돼 있음은 물론이다.

실제 국제금융시장에서도 달러화의 약세 움직임은 뚜렷하다. 달러화는 사실상의 정부 관리 체제인 위안화를 제외하면 엔화 유로화 등 다른 통화에 비해 큰 폭으로 가치가 떨어졌다. 엔화는 달러당 82엔대까지 솟구쳤고 한국 브라질 인도 같은 신흥국들의 통화 가치 또한 크게 뛰어오르고 있다. 미국의 몸부림이 전 세계적 파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달러화 약세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00년대 들어 매년 4000억~8000억달러에 이르고 있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개선될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5년 내 미국의 수출을 2배로 늘리고 이를 통해 경제 회생을 도모하겠다고 공언해 놓은 상황임을 생각해도 그러하다. 지금은 강경하게 버티고 있는 중국 또한 천문학적 규모의 외환보유액과 무역흑자,국제적 여론 등을 감안하면 머지않은 장래에 어쩔 수 없이 통화가치 상승 대열에 동참할 공산이 크다.

비(非)달러 통화들이 강세를 보이면 이들 통화의 거래 또한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마련이다. 투자자들로선 달러를 팔고 다른 통화를 사들이는 것이 이익이 되는 까닭이다. 국제외환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누려온 달러화의 거래 비중이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사카키바라는 이런 점을 거론하면서 '달러화 일극(一極)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으며 기축통화의 '다극(多極)시대' 또는 '무극(無極)시대'가 시작됐다고 단언했다. 일본만 해도 과거 달러화 이외의 외환은 알지도 못했던 '와타나베 부인'들이 지금은 안방에서 유럽 동남아 중남미 등 온갖 나라의 화폐를 거래하고 있고,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돼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로화 엔화 위안화 등이 벌써 달러화에 필적하는 호적수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를 이끄는 슈퍼파워로서 미국의 힘과 정치력 등을 감안하면 달러화가 하루 아침에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하지만 중장기적 시각으로 보면 달러화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의 환율전쟁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것은 국제 통화질서 재편을 시사하는 전주곡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다.

이봉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