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모든 게 얼었던 장진호 전투…그의 카메라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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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 존 리치 지음 | 이진혁·정경아 옮김 | 서울셀렉션 | 248쪽 | 6만원
바퀴가 둘 달린 수레를 끄는 어머니의 표정은 초조하고 절박하다. 수레에는 곡식 한 가마와 최소한의 생필품이 실려 있고,갓 돌이 지난 듯한 아기와,동생이 수레에서 떨어질까봐 무릎에 앉힌 채 깍지 낀 손으로 뒤에서 안고 있는 소녀가 앉아 있다. 반바지,반팔 차림에 고무신을 신은 채 뒤에서 수레를 밀고 가는 소년은 카메라가 신기한지 어색하게 웃고 있다. 한시바삐 자식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어머니의 초조한 표정과 아들의 어색한 웃음.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한국전쟁 때 3년 이상 종군기자로 전장을 누볐던 미국인 존 리치(92)가 당시로선 드물게 컬러로 찍은 사진들을 모은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담긴 사진 중 한 장이다. 한국전쟁 동안 약 320만명이 피난을 가야 했고,그 외 30만명은 전쟁을 피해 해외로 떠났다. 특히 성인 남자의 대부분은 남이든 북이든 한쪽으로부터 징집을 당해 피난민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 책은 리치가 코닥의 전설적 컬러 필름인 코다크롬으로 찍은 고화질의 사진 170여점을 담은 사진집이다. 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한국전쟁,베트남전쟁,아프리카 내전을 비롯한 20세기 주요 분쟁 지역을 빠짐없이 취재한 베테랑 종군기자다. 그는 특히 한국전쟁 발발 초기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UPI의 전신인 INS(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와 NBC 특파원으로서 전장을 누비며 전황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도쿄특파원 시절 갖게 된 니콘카메라에 코닥의 슬라이드필름을 넣어 전쟁의 다양한 모습을 900여컷에 담았다. 당시 종군기자 가운데 컬러필름을 사용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는 촬영한 필름을 뉴욕주 로체스터의 코닥 본사로 보내 현상한 다음 필름이 되돌아오면 이를 주석으로 테두리를 한 일본식 차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기억 속의 얼굴들''폐허의 그늘''사선에서''전쟁과 무기''전쟁 속의 일상''지난했던 협상' 등 6개의 주제로 분류돼 편집됐다. 폐허가 된 서울 거리,지붕의 절반쯤이 부서져 나간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철모에 진달래를 꽂은 소년 병사,탱크 위에서 손을 흔드는 미군 병사,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망울,부서진 전투기 위에 올라타 환히 웃는 까까머리 소년….폭파된 한강철교,경회루 근처에 배치된 대포진지,불에 타버린 기차의 앙상한 뼈대,굴뚝만 남기고 모두 부서져버린 공장들은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
리치가 단 사진설명들은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전해준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다. 미군 제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장진호 근처 산속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2주간 사투를 벌이다 극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전투다. '
이런 사진설명이 붙은 사진의 주인공은 황소 한 마리에 달구지를 맨 채 피난을 가는 남녀다. 얼마나 추웠던지 여자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길을 나섰고,이들 뒤로 완전군장 차림의 미 해병대가 전장의 긴박함을 말해준다.
리치는 한국에서 찍은 필름들을 미국 메인주 고향집에 보관해 뒀다가 근 50년의 외국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뒤 귀향해서야 발견했다. 그의 사진들은 2008년 언론을 통해 일부 공개된 데 이어 지난 4일부터 청와대 사랑채에서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리치는 프롤로그에서 "이 사진들은 시대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보냈던 내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며 "내 바람은 이 사진을 보는 독자들이 한국전쟁을 과거의 역사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진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그를 겪어야 했던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그리고 강인한 소생의 의지를 떠올려 보라는 것이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