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사라졌다고 여겨졌거나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드가와 피카소,르누아르 등 거장들의 작품 140여점이 소더비 경매에 매물로 한꺼번에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한 은행 지하금고 속에 숨겨졌던 작품들이 공개되면서 유럽 미술계는 "20세기 미술계가 잃어버린 보물이 마침내 귀환했다"고 반색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3일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 은행이 1939년부터 보관하고 있던 드가와 세잔,피카소 등의 작품 140여점이 소더비의 파리와 런던 매장에서 경매 목록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헬레나 뉴먼 소더비 부회장은 "70여년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던 걸작을 다시 보는 것은 마치 '잃어버린 세계'를 대면하는 것과 같다"며 "경매 목록에는 피카소와 르누아르의 판화작품 같은 희귀작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경매에 나온 작품들은 20세기 초 유럽 미술계의 거상이었던 앙부루아즈 볼라르가 소장했던 것으로 세잔,고갱,고흐,르누아르 등 19세기 거장들의 작품을 비롯해 파블로 피카소와 야수파의 거장 앙드레 드랭 등 20세기 화가들의 걸작까지 고루 갖춰져 있다.

런던 경매소에서 거래될 드랭의 '콜리우르 해변의 나무들'(사진)은 900만~1400만파운드(153억~240억원)의 거액에 낙찰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파리에서 경매될 세잔의 '에밀 졸라 초상화'는 50만~80만유로(7억3000만~12억원),피카소의 에칭작품은 25만~40만유로(3억7000만~5억9000만원),드가의 판화는 20만~30만유로(3억~4억4000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 작품은 2차대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1939년 볼라르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뒤 그가 소장하고 있던 600여점의 걸작 미술품들은 유고계 유태인인 에리히 슬로모비치에게 넘겨졌고,슬로모비치는 나치 독일에 의해 파리가 점령되기 직전에 140여점의 작품을 소시에테제네랄 금고에 맡겼다. 남은 400여점은 유고슬라비아의 고향집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슬로모비치는 1942년 나치의 유태인수용소에서 사망했고,그가 유고슬라비아로 가져갔다가 주인을 잃은 작품들은 이후 베오그라드 국립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이 돼버렸다. 소시에테제네랄 은행 금고에 보관됐던 작품들은 1981년이 돼서야 존재 여부가 알려졌고 소시에테제네랄 측은 "보관료가 밀렸다"는 명목으로 작품 매각을 추진했다. 이후 은행과 볼라르 및 슬로모비치 후손 간 지루한 소유권 분쟁이 이어졌으나 결국 관계자 간에 법적 합의가 이뤄져 경매가 성사됐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