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취해 비틀거릴 때가 있다. /아스팔트 갈라진 틈에 구두 끝을 비비다가/ 밖으로 고개 내어미는 풀꽃의/ 쥐어박고 싶을 만치 노란/ 콩알만한 꽃송이를 보거나/ 구두 끝에 꽃물 남기고 뭉개진 꽃의 허리가/ 천천히 다시 들릴 때.'

황동규 시인의 '삶에 취해' 전반부다. 어디 그때 뿐이랴.책상 위 화분의 꽃이 하룻새 창쪽으로 죄다 고개를 돌린 걸 발견한 순간의 어지러움이란.햇빛의 힘은 이처럼 놀랍다. 아스팔트 사이에 핀 풀꽃도,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도 햇빛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하다.

세계 곳곳에서 가뭄과 홍수 등 이상 기후로 인한 재해가 발생하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이상 저온과 잦은 비로 일조량이 뚝 떨어지고 있다는 어두운 소식이다.

우리나라에선 원래 2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진달래 필 때부터 아카시아 질 때까지)를 봄철 산불조심 기간으로 친다. 건조한 날씨 탓에 산불이 번질까 산림청과 소방방재청이 가슴을 졸인다는 시기인데 올해엔 걸핏하면 비가 내리면서 3월의 일조시간(태양의 직사광이 지표면에 비친 시간)이 평년의 61% 수준인 125.1시간으로 역대 최저였다는 것이다.

지역별 강수 일수만 해도 전남은 3월 말까지 39일로 지난해보다 11일,경남은 32일로 9일이나 많았다. 대구 · 경북지역도 마찬가지.강수량이 지난해의 2배나 되면서 햇볕이 전혀 측정되지 않은 날이 3월에만 8일이나 있었다고 할 정도다.

해가 안드는데 온도까지 낮으니 과일 채소 할 것 없이 썩거나 수정이 안돼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다.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는 시설 농가 대다수가 피해를 입었는데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농어업재해대책법에서 인정하는 재해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마당이다.

작황이 나쁘니 배추와 무는 물론 고추 호박 등 채소와 딸기 토마토 값 모두 폭등하고 수박 참외 값도 심상치 않다고 한다. 게다가 4월 중순인데도 기온은 낮고 비는 잦다. 올 여름철 날씨도 예측하기 어렵다. 피해 농가에 지원책을 강구한다지만 문제가 계속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궂은 날씨는 사람들 마음도 어둡게 만든다. 일조량이 많은 나라에선 자살률이 낮고 우울증 환자 또한 일조량이 적은 나라의 20%에 불과하다는 보고도 있다. 안그래도 불안하고 울적한데 해까지 안들면 더 우울해 진다 .쨍 하고 해뜰 날이 그리운 봄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