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쓰나미'가 몰려온 것처럼 엄청난 비극이 우리를 덮치고 있다. 1200t급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하고 다수의 승조원들이 목숨을 잃은 데다,아직까지 그 정확한 침몰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한준호 준위와 금양호 선원 9명 등 또 다른 의인들의 희생도 이어져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천안함 사태는 단순히 '슬프다'는 의미에서의 비극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아니 그보다도 더 커다란 비극이 있었고,앞으로도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이런 비극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이 슬픔을 그 가족과 친지의 몫으로만 여기지 말고 우리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나라를 위한 슬픔으로 승화시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일반인의 죽음과는 다르게 명예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유가족이 있다. 자신들의 아들과 남편,혹은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희생된 데서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누가 닦아줄 수 있겠는가. 물론 천안함의 승조원들은 유가족의 아들과 남편,아버지이기도 하지만,동시에 우리 모두의 아들이고 남편이며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들의 죽음에는 우리 모두를 위해 바친 희생,즉 '순국(殉國)'이라는 숭고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고사와는 구분되어야 하며 유가족들이 흘리는 눈물도 '그들만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눈물'이 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았을 때,참으로 아쉬운 느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위대한 죽음 앞에 경건함과 엄숙한 마음으로 참을 것은 참고,기다릴 것은 기다려야 하는데,마치 축구경기를 관전할 때처럼,호들갑을 떤다면 곤란하다. 축구경기를 볼 때 우리 모두 하루아침에 축구 전문가가 되어 선수 선발을 어떻게 했는지,왜 선수 교체를 빨리 하지 않았는지,별별 시시콜콜한 질문들조차 마구 쏟아낸다. 또한 그것이 축구경기에 대한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천안함의 비극은 다르다. 운동경기에서처럼 각자 나름대로 "배놓아라 감놓아라"하면서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휘젓고 다님으로써 '배가 산으로 오르는 상황'을 야기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보다는 공동운명체로서 나라의 안위가 달린 중차대한 문제이기에 말 한마디,행동 하나하나에 극도의 절제와 경건함이 묻어나야 할 사안이다.

이 천안함의 비극을 바라보는데,여당이냐 야당이냐에 따라 입장이 다르고,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관점이 다르며,저질 누리꾼이냐 양식 있는 누리꾼이냐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거 로마인들은 나라의 큰일을 당할 때마다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라는 뜻의 '쿠이보노(cui bono)'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호사가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마구 늘어놓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가"라는 물음을 우리 스스로 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이 된 천안함의 승조원들은 지금도 이 순간 바다 깊은 곳에서,혹은 저 하늘 위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할 것인가. "국가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기보다 내가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물으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말로 의혹해소를 위해 무엇이든 다 공개하라고 다그치기보다 나라의 부름에 응답하여 영웅답게 죽음을 맞이한 그들을 위해,또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엄숙하게 생각해야 할 때다.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