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업을 이해하기 위한 틀로서 '기업생태계 프레임'이 강조되고 있다. 생태계란 전체의 질서와 조직에 관한 사고로 '점'의 관점에서 '고리'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기업생태계는 창업 후 5년이 지나면 80%가 사라지고,매출 1000억원을 넘은 기업의 경우 5년내 부도날 가능성이 많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산업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기업의 비중이 1%에 불과한 호리병 구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해 최근 정부는 중견기업육성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기존 중소기업지원정책이 중소기업을 영원히 중소기업으로 남아있게 만들어 왔다는 고민의 소산이다. 매출액 중심의 정책에서 탈피,중소기업에서 졸업한 뒤에도 조세부담을 경감시켜주기로 한 것은 성장의 족쇄를 풀어주고 중소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이끌고자 하는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이 중소기업과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중소기업-중견기업-히든챔피언으로 발전하는 생태계 모형으로 정착되려면 운용의 방향이 명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중견기업 육성정책은 기업에 대한 정부지원의 범위를 놓고 논쟁의 이슈만 제공할 뿐이다.

우선 중견기업정책은 기업생태계의 허리 역할을 하는 부품소재엔지니어링산업을 키우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그 결과로 고용창출의 플랫폼이 되고,제조중심 국가생태계를 연구개발중심 생태계로 진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창업자에게는 딜레마가 있다. 대체로 연간 100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던 기업은 5년간 성장이 정체되다가 망하거나 도약하는 양극단의 길을 맞이하게 된다. 무너지는 회사는 장비 도입을 열심히 하고 범용제품을 싸게 만드는 장비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공하는 회사는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전문성을 가지고 해외시장 개척의 플레이어가 된 경우이다.

필자는 현재 정부정책의 수혜자가 될 중견기업들이 대체로 연구 · 개발투자와 글로벌 시장개척의지가 부진하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40만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는 독일의 지멘스,13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일본전산,1만명의 종업원기업으로 2002년도 노벨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시마즈제작소는 최종소비재가 아닌 산업재를 생산하는 부품소재엔지니어링의 전문업체들이다. 이들은 생산성보다 창조성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지멘스는 4만여개의 특허와 5만여명의 연구개발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며,종업원 100명당 특허수가 10개 정도에 이른다.

다음으로 중견기업정책은 해외시장의 재발견 기회가 돼야 한다. 지금 우리 기업들은 역사상 최고의 글로벌화 호기를 맞이하고 있다.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 보여준 능력이 세계경제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중견기업정책은 전문기술을 지니고 해외진출 준비가 된 중소기업이 글로벌시장에서 마음껏 뛸 수 있도록 지원하여 대한민국의 히든챔피언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해외시장에 관심이 없는 중견기업을 돕는 것은 중소기업정책의 파이를 나누는 행위에 불과하다. 프랑스에서 히든챔피언 도약 지원을 위해 도입된 경제현대화법도 중견기업의 해외시장 개척을 강조하고 있다.

중견기업정책이 해외진출 준비를 마친 중소기업의 글로벌화를 지원하고 연구개발혁신의 생태계 개체를 발굴함으로써 한국경제 생태계의 건강성을 제고하는 분기점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나라는 매출액 빈곤보다는 고용 빈곤이 더욱 심각한 상황에 있다. 과거 우리 경제가 대기업을 기반으로 한 매출액 창출로 성공했다면,이제 중견기업에 의한 고용창출을 통해 선진경제로 도약했으면 한다.

김기찬 <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