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어름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옹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꽃 피기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정지용 '춘설')

겨우내 숨죽였던 산천이 기지개를 펴고 싹을 틔우는 계절이다. 남녘에선 꽃소식도 들려온다. 하지만 바람이 거세고 때론 꽃샘추위가 찾아온다. '봄 추위가 장독 깬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요즘 추위는 의외로 맵다. 느닷없이 함박눈이 쏟아져 '깜짝 설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사실 봄 눈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대관령에선 5월에도 두 차례 눈이 내렸다. 3,4월 눈은 대관령뿐 아니라 서울 이남에서도 자주 관측됐다. 지역별로 가장 늦게 내린 눈은 서울 4월19일(1911년) 대전 4월18일(1977년) 광주 4월28일(1988년) 대구 4월9일(1963년) 부산 4월20일(1929년) 등이다. 1989년 3월7일엔 대관령에서 무려 177.7㎝의 폭설이 쏟아지기도 했다. 2004년 3월4일엔 서울 18.5㎝의 눈이 내리는 기록을 세웠고,2005년 3월 5~6일엔 부산 포항 등 남부지방에 많은 눈이 왔다.

봄에 가끔 큰 눈이 내리는 데는 까닭이 있다. 남서쪽의 따뜻한 기류가 계속 유입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북쪽의 한기가 내려오면 구름층이 두텁게 형성되며 함박눈으로 변하는 것이다. 온난화 영향으로 대기의 에너지가 많이 축적됨에 따라 찬 기류와 더운 기류의 충돌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최근 대설이 잦아지는 이유로 꼽힌다. 지난 9~10일 큰 눈이 온 것도 기온이 올라가 대기 하층부에 가득찬 온습한 공기와 상층부의 차가운 시베리아 고기압이 부딪치면서 눈구름이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 영조 때의 기녀로 알려진 매화는 '매화 옛 등걸에 춘절이 돌아오니/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 하다마는/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고 읊었다. 겨울과 봄이 혼재하는 요즘이지만 경칩(6일)은 지났고 춘분(21일)도 멀지 않았다. 한두 차례 기온이 떨어지고 눈 · 비가 오겠으나 이달 말부터는 따뜻해져 꽃피는 시기도 평년보다 빨라질 것이란 예보다. '봄눈 녹듯이 스러진다'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눈이 쌓여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봄을 막지는 못한다. 혹 취업난 생활고 등으로 실의에 빠졌더라도 그늘진 마음 툭툭 털어내고 새봄을 맞을 일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