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퀸' 김연아(20.고려대)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 피겨스케이팅도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

19세기 후반 스케이트가 처음 한국에 도입된 이후 늘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김연아의 등장으로 단숨에 세계무대의 주목을 받는 강국으로 자리잡았다.

◇김연아, 내딛는 걸음마다 새 역사

김연아의 등장은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100년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주니어 시절부터 김연아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그대로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빛나는 한 페이지가 됐다.

7살 때 스케이트를 시작한 김연아는 이미 11살 때였던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전국 종합선수권대회를 5연패한 '될성 부른 떡잎'이었다.

2002년 트리글라브트로피대회 노비스(13세 이하) 부문 우승, 2004년 9월 주니어 그랑프리 우승, 2006년 3월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등 김연아는 일찍이 한국 선수가 밟지 못했던 길을 거침없이 개척했다.

특히 2006년은 한국이 1968년 그르노블 대회 이후 처음으로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며 '아픈 기억'을 남긴 해였다.

한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 김연아가 희망의 빛을 쏘아 올린 셈이다.

2006-2007 시즌부터 시니어 무대에 나선 김연아는 한국 최초를 넘어 세계 최초의 길을 걸었다.

2007년 3월 세계선수권에서 쇼트프로그램 역대 최고점인 71.95점을 받으며 발동을 건 김연아는 부상과 부담을 털어버린 2009년 화려하게 비상했다.

그해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신채점제(뉴저지시스템) 도입 이후 여자 싱글에서 '마(魔)의 점수'로 여겨지던 200점을 사상 처음 뛰어넘은 207.71점을 기록했고, 2009-2010 시즌 첫 그랑프리 대회에서 210.03점을 받아 사상 처음으로 210점대의 벽까지 깨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김연아는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목에 걸며 의문의 여지 없는 '피겨 여제'로 등극했다.

성적도 놀랍지만, 이 모든 것이 '피겨 변방'으로 불리던 한국에서 나온 선수가 이뤄냈다는 점에서 더욱 대단한 성과다.

김연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변변한 성적을 내기도 어려웠던 약체였기 때문이다.

◇황실 눈총받으며 등장..'풍기문란'으로 잡혀가기도

문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국에 서구식 스케이트가 처음 도입된 것은 대략 1890년대 중반~1900년대 초반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를 정리한 '한국의 피겨스케이팅 100년사'는 "남녀가 스케이트를 타며 손을 잡았다 놓았다 재주를 부리는 것을 황후가 불쾌해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적고 있다.

도입 초기부터 피겨스케이팅의 페어나 아이스댄싱과 비슷한 것이 알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최초의 피겨스케이팅 클럽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피겨 스케이팅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1925년 전조선 빙상대회에서 스피드 경기 중반 피겨 시범경기가 열리면서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국내 공식 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수준은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얼어붙은 한강이나 대동강에서 펼쳐진 스케이트 경기는 3만여 명이 구경하러 몰릴 만큼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대부분 스피드 경기에 국한돼 있었다.

1929년 컴펄서리 종목(빙판 위에 일정한 도형을 그리는 경기)이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20년이 지난 1950년대에 외국에서 온 선수의 시범에 모두가 놀랐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한국 피겨의 수준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선수도 남자 선수밖에 없어, 페어스케이팅도 남자 선수끼리 훈련하고 경기를 치르는 상황일 만큼 저변도 좁았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빙상경기연맹의 전신인 조선빙상경기협회가 발족하면서 조금씩 활기를 띠었다.

해방 이후 한국보다 스케이트 도입이 빨랐던 중국 만주나 베이징 등지에서 연습하던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여자 선수도 생겨났다.

만주에서 태어나 스케이트를 탔던 신정자가 한국 최초의 피겨 스케이터로 알려져 있으며, 홍용명이 1948년 한국의 첫 피겨 대회에서 우승해 최초의 여자 챔피언으로 이름을 남겼다.

물론 여전히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국내의 인식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1950년대 열린 경기에서는 페어스케이팅 시범 경기를 준비하던 남녀 선수가 풍기문란으로 연행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피겨스케이팅은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종목이기도 했다.

특히 여자 선수 가운데 홍용명은 늘씬한 키에 돋보이는 외모로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40~50년대 초 홍용명이 창경원이나 덕수궁에 연습을 하러 나타나면 그에게 스케이트를 신겨주고 싶어하는 남학생들이 줄을 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연습을 할 때면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꾼 때문에 활주할 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우물 안 개구리'의 50년 암중모색

한국 피겨는 1960년대 한 단계 성장했다.

1964년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개장되면서 선수들이 배출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돌아온 코치들 덕에 기술적으로도 도약했다.

동계올림픽 도전도 이때 시작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이광영(남자)과 김혜경, 이현주(이상 여자)가 1968년 그레노블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면서 올림픽 무대에 첫 발을 디뎠다.

셋은 나란히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외국의 정상급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직접 지켜본 것만으로도 한국 피겨스케이팅에겐 큰 자극이 됐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선수들이 일본과 미국, 유럽 등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의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다.

비록 하위권을 면치 못했지만 1972년 삿포로 대회, 1976년 인스브루크 대회 등 동계올림픽 도전도 계속 이어졌다.

유학파 선수들은 1980년대에도 국제무대 도전을 계속하며 조금씩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에 출전했던 신혜숙과 1988년 캘거리 대회 여자 싱글의 변성진 등은 비록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후 국가대표 코치 등을 역임하면서 좋은 선수들을 양성했다.

특히 신혜숙 코치는 김연아의 어린 시절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은 실력이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아시아 선수에 대한 차별적인 판정도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를 대표하던 빙상 강국 일본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는 1992년 알베르빌 대회에서 이토 미도리가 여자 싱글 2위에 오르면서 첫 메달을 따냈을 만큼 장벽은 높았다.

1990년대 들어 일본과 중국의 피겨스케이팅이 괄목할 성장을 거두면서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제자리걸음을 걷던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오히려 이와 대비돼 더 뒤로 밀려나는 처지가 됐다.

국제대회도 종종 유치하며 저변은 넓어졌지만, 국제무대와의 수준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웠다.

1992년과 1994년, 1998년 계속해서 올림픽 무대를 두드렸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한국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아시아컵 2연패를 달성했던 남자 싱글의 정성일도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에서 17위에 오른 게 최고 성적이었다.

200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여자 싱글에서 기대를 받았던 박빛나는 27명 중 26위에 그쳤고, 남자 싱글의 이규현은 컷 통과에 실패해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펼치지도 못했다.

2006년에는 1968년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4년 만에, 모든 게 바뀌었다.

김연아의 등장과 함께 한국은 단숨에 피겨 강국으로 올라섰다.

김연아의 성적도 놀라운 성과지만, 김연아가 국제무대에서 맹활약하며 '피겨퀸'으로 떠오르면서 어린 꿈나무들에게도 목표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지금도 전국의 빙상장에서는 '김연아 키드'들이 제2의 피겨여왕을 꿈꾸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sncwoo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