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인 어제 다시 고향 강릉에 왔다. 지난 여름부터 단 한 주일도 빼놓지 않고 해오는 일이다. 그래도 새해 첫날에 길을 떠나자니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벌써 반년 넘게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일산 집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에 새로운 트레킹 코스 '강원도 바우길'을 개척했다.

제주 올레길에 대한 얘기를 들은 고향 사람들이 산과 바다와 강과 호수를 가지고 있는 우리 강원도에도 그런 길 하나 만들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마을 안에 있는 평지 길들은 모두 자동차가 다니는 길로 넓혀지고 포장됐지만,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평지길보다 더 빠르게 다니던 산길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느냐고 했다. 얘기를 듣고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것은 열 개도 넘는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는 일이 창작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난 여름 나는 새로운 장편소설을 막 시작했다.

그런데 주말에 한 번 두 번 고향에 내려가 예전에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던 옛길을 걷다보니 풀숲에 숨어 있던 길들이 자기가 먼저 얼굴을 내밀며 내 유년의 추억들과 그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숨결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어쩌다 한번 걸어도 내 자신이 이토록 즐거운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옛길을 찾아 마을과 마을을 잇는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면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도 즐겁고 고향 사람들도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래.그렇다면 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원고만 들여다보면 자신이 없다가도 고향에 가서 옛길을 걸으면 지금 쓰고 있는 소설도 잘 쓰고,길도 잘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이 불끈 솟았다.

길 이름도 '강원도 바우길'이라고 지었다. 그것은 강원도 감자바우를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고 또 희랍 신화보다 2000년 이상 앞선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건강의 여신 이름이기도 했다. 누구나 이 길을 한 번 걷기만 해도 저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것이라는 주술적(呪術的)인 의미와 신화적인 의미까지 담아 붙인 이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길 위에서 제일 먼저 몸과 마음으로 위로받는 사람이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다. 코스 하나하나를 걸을 때마다 오래도록 고향을 떠나 있는 작가로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정서도 듬뿍 느끼고 지친 몸과 마음도 저절로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한 가지 몰랐던 것이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길을 나와 한국산악회 이기호 대장 둘이서만 개척해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불과 몇 달이 지난 지금 강원도 바우길은 이 길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진심어린 걱정 속에,또 이 길을 사랑해 먼 곳에서 힘을 보태러 오는 분들의 걸음 속에,또 지금 참여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기며 언젠가는 꼭 걸음을 보태러 오겠다고 약속하는 더 많은 사람들의 애정 속에 한 구간 한 구간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것은 지난 여름 처음 이 길을 개척할 때만 해도 몰랐던 일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바우길 곳곳에 깃든 숲의 정령과 나무들의 정령과 새들과 꽃들의 정령과 이 길을 함께 개척해가는 시민들의 순수한 마음이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다치지 않도록 언제나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인간친화적이고,자연친화적인 길로 바우길을 지켜나가는 일이다.

열 개의 코스를 서로 이어 붙여 길 개척을 끝냈을 때,일주일의 절반을 내 책상에서 쓰던 소설도 끝이 나 곧 책을 출간한다. 지난 여름과 가을 내가 소처럼 걸었던 길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