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버락'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유키오'라고 불렀다. " 지난 11월13일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는 도쿄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미 · 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정상이 서로 존칭이나 성(姓)을 붙이지 않고,이름만 부를 정도로 신뢰를 쌓았다는 점을 과시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서 하토야마 총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친구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두 친구 사이가 급격히 벌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기후변화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주요국 정상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면서 하토야마 총리만 쏙 빼놓았다. 하토야마 총리가 오는 18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15)' 정상회의가 열릴 때 별도로 만날 것을 비공식 타진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도화선은 미군기지 이전


미 · 일 간 갈등의 도화선은 오키나와 미군의 후텐마 비행장이다. 도시의 팽창으로 이 비행장이 주거지에 둘러싸이게 되자 주민 안전을 위해 10여년 전부터 이전이 추진됐다. 찬반 논란을 거쳐 2006년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의 나고시 연안을 매립해 이전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그러나 나고시 주민들은 미군 비행장이 들어오는 것에 반대했고,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선거 공약으로 '후텐마 비행장의 오키나와 밖 또는 국외 이전'을 내걸었다.

문제는 하토야마 총리가 이 공약에 발목을 잡혀 우왕좌왕하고 있는 점이다. 후텐마 비행장 해법에 대해 미국과의 기존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오카다 가쓰야 외상과 연립정부 이탈 카드로 공약 이행을 주장하는 후쿠시마 미즈호 사민당 당수가 대립하는 등 여권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이런 상황에서 하토야마 총리는 미국 측이 반발하면 "미 · 일 합의,미 · 일 동맹이 중요하다"고 했다가 반발론이 제기되면 "오키나와 현민의 부담을 줄이는 게 우선이다" "연립정권 유지가 중요하다"고 하는 등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의 오락가락 행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대만 높여 현지 여론을 '오키나와 내 이전 불가'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하토야마 정권 출범 이전만 해도 민주당이 8 · 30 총선 공약으로 후텐마 비행장 오키나와 외 또는 외국 이전을 제시했지만 외교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실행되긴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하토야마의 '반미'를 의심하는 미국


일본과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끈끈한 애증의 동맹을 맺어왔고 항상 일본이 미국측에 고개를 숙이는 관계를 유지했다.

두 나라의 인연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일본의 개항과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면서 시작됐다. 1905년엔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인정하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한일 강제병합의 빌미를 제공했다. 1951년 미 · 일 안전보장조약(1960년 개정)을 맺어 군사협력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축으로 1950년대부터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선진국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하토야마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국 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흐르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하토야마 총리에게 단단히 뿔이 나 있다. 특히 외교 문제에 대해 말과 태도가 표변한 점에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다. 지난달 미 · 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에 대한 연내 결론,특히 기존 합의 준수를 전제로 한 결론을 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나를 믿어 달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기자들에게 "(후텐마 비행장 이전은) 백지상태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느낄 법하다.

하토야마 총리는 또 내년 7월 참의원 선거 승리를 위해 연립여당인 사민당과의 공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의) 결론을 내년으로 미루겠다" "다른 대안을 검토하도록 각료들에게 지시했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그때마다 하토야마 총리에 대한 미국의 불신은 커져갔다.

특히 미국 정치권에선 '하토야마 총리가 반미주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나왔다. 그가 총리 취임 이전부터 '대등한 미 · 일 관계'를 강조하고,중국 방문 때는 "지금까지 일본이 미국에 너무 의존했었다"며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장한 전력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외교정책 브레인인 데라시마 지쓰로 일본종합연구소 이사장이 언론기고 등에서 "종전된 지 60년이 넘은 독립국가에 외국 군대가 상시 주둔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주일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점도 기억하고 있다.

급기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시했다. 미국은 내년 미 · 일 안보조약 개정 50주년을 맞아 연내에 개최하려던 양국 간 동맹강화 협의를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방침을 일본 정부에 최근 통보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 측의 경고로 해석된다. 이 협의는 지난달 미 · 일 정상회담 합의 사항이었다. 지난 9일에는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이 코펜하겐에서의 미 · 일 정상회담 거부 방침을 분명히 했다.

주일미군 관계자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을 점령군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가라면 철수하면 된다"고까지 말했다. 미국에선 하토야마 총리의 속내가 "결국 자주국방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의 오카모토 유키오 외교평론가는 "하토야마 총리가 총선 전부터 '대등한 미 · 일 관계'를 강조하며 미국과 거리를 둔 것이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미 · 일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후지사키 이치로 주미 일본대사는 10일 워싱턴에서 일본 기자들과 만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며 "미국 측의 우려를 중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