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3시 천안 유관순체육관.
프로배구 남자부 챔피언결정전 2차전 현대캐피탈-삼성화재 경기가 시작되려면 아직 4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체육관 코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프로배구 현대캐피탈과 흥국생명 홈구장인 천안 유관순체육관의 장내 아나운서인 한상훈(34) 씨도 이들 틈에 섞여 행사 리허설을 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날은 천안 현대캐피탈의 시즌 홈 관중이 2005년 프로배구 출범 이후 처음으로 9만 명을 돌파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면서 더욱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한 씨는 "경기 시작 5시간 전쯤 경기장에 도착해서 리허설을 한다"며 "관중이 즐겁게 경기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일"이라고 말했다.

스포츠 경기 장내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한 씨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2004년이었다.

레크리에이션 사회자로 일하다 평소에 좋아하던 스포츠와 사회자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장내 아나운서를 시작했다.

이어 2007~2008시즌부터는 겨울철에는 프로배구 현대캐피탈과 흥국생명, 여름철에는 롯데 자이언츠 장내 아나운서 일을 해오고 있다.

일의 성격상 장내 아나운서는 경기 내용이나 선수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 수천, 수만 명의 관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관중의 응원 목소리가 작을 때는 기분을 맞춰주며 더 큰 호응을 유도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경기장에서 홈팀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하는 일이 장내 아나운서의 중요한 일 중 하나인데 실제 선수들이 이런 분위기 때문에 경기를 잘 풀어나가 이겼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경기 중 현대캐피탈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현대캐피탈 선수들은 집중력이 강한 선수들입니다.

어금니를 깨물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합니다"는 말을 마법처럼 반복했다.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이 삼성화재와 1차전에서 무기력하게 진 뒤 선수들에게 강조했던 말을 자신의 입을 빌려 계속 전한 것이다.

이 말에 분발한 현대캐피탈 선수들은 경기 막판 다시 한번 힘을 내면서 라이벌 삼성화재를 꺾었다.

한 씨는 최근 대한항공 장광균이 인터뷰에서 한 말을 거론하며 자신의 일이 새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장광균 선수가 '현대캐피탈과 천안 경기에서 그 쪽 홈 아나운서 때문에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 졌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느라 전혀 제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고 좀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한 씨는 이날도 선수 소개부터 시작해서 응원 유도, 관중에게 선물을 나눠 주는 이벤트 진행 등을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해냈다.

오후 9시가 넘어 홈팀 현대캐피탈의 승리를 자축하는 노래가 코트에 울려 퍼지고 선수와 팬과 만남 등 이벤트가 모두 끝나고 나서도 한 씨는 좀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벤트가 매끄럽게 진행됐는지 구단 관계자들과 얘기하고 선수들 플레이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들어 다음 경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방송인 김제동은 대구야구장에서 무명의 장내 아나운서 시절 현재 요미우리에서 뛰는 '국민타자' 이승엽과 인연을 맺었고 방송으로 진출하면서 스타로도 거듭났다.

그에게도 김제동 처럼 TV에 나오는 유명 사회자의 꿈은 없을까?.
"저는 현대캐피탈 후인정 선수가 최고령 배구선수인 것처럼 최고령 장내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 꿈이다"며 "많은 이들이 40살이 넘으면 누가 장내 아나운서로 쓰겠느냐고 말하지만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장내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싶다.

그건 전적으로 내 자신에게 달렸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박성진 기자 sungjinpark@yna.co.kr